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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빈민층, 서민층, 중산층, 특권층>
작성자장종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0-31 조회수542 추천수0 반대(0) 신고
 

<빈민층, 서민층, 중산층, 특권층>


일전에 나온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 90%가 서민으로 자처했다.

우리나라가 2 대 8 사회가 아니라

1 대 9 사회인 듯싶다.

서민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빈민층에 속하는 사람이 숱하게 많다.

노점상, 행상(1톤 트럭), 영세상인,

실업자, 청년 실업자, 840만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은 서민으로

분류하기도 마땅치 않다.

서민층으로 자처하는 90% 국민도

빈민층과 서민층으로 나눌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 경제 구조에서는

빈민층과 서민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빈민층이 서민층으로라도 올라서서

서민으로 자처하는 90% 국민이

실제로 모두들 서민이었으면 좋겠다. 

 

 

<비관조차 버거운 빈곤층의 불안>-양승훈

  

1992년 내가 사는 동네의 국회의원은 ‘대발이 아버지’였다. 1980년대 노동운동 전문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야당의 이상수가 재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동네 사람들이 이상수 사무실에 찾아가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TV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인기를 이기지는 못했다. 동네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들은 탤런트 이순재가 국회의원이었을 때 해준 일은 동네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강당을 지어준 것뿐이라고 했다. 다음 선거에서 이상수가 당선되자, 동네 아저씨들은 ‘서민층이 많아서 야당을 지지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총선, 여당의 바람이 세거나 말거나 ‘전통적인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던 우리 동네에서 TV 오락 프로그램 <도전 1000곡>을 진행하던 유정현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아저씨들은 “다 여편네들 때문”이라며 욕했다. 얼굴만 보고 찍었다는 거였다. 그리고 ‘젊은 것들’이 투표를 안 해서라며 꾸짖었다.


2010년이 되어 정부·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내가 사는 동네의 구청장에는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계급투표’에 대한 정치학의 고전적 가설처럼 부자가 늘어난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보수화한 걸까? 아니 이런 식의 질문 방식은 적절한 것일까? 과연 이런 이야기로 동네 사람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을까?


‘대발이 아버지’에서 ‘도전 1000곡’으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한동네에서 20년 넘게 살았다. 처음 동네에서 만난 친구가 지금까지 친구다. 그들 대부분은 이사를 가지 않았다. 이사를 가더라도 동네 주위를 맴돌았다.


엄마들은 봉제·피혁 공장을 다니거나 장사를 하고, 아버지들은 젊어서는 공장의 재단사·막노동·장사 등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경비나 공공근로 등을 한다.(1) 어렸을 때 ‘대기업’에 다니는 양복 입은 아빠는 거의 본 적이 없다. 일을 안 하는 엄마도 거의 본 적이 없다. 공장에 다니지 않으면 집에서라도 ‘부업’으로 일감을 받아 일했다.


모두 살림살이는 고만고만했다. 아파트에 사는 아이를 부잣집 아이라고 생각했고, 대부분 단독주택에서 전세나 월세를 살았다. 단독주택에서 세를 끼고 주인집으로 살던 나를 친구들은 ‘부잣집 애’라고 생각했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전 9시까지 봉제공장에 출근하고 오후 1시 점심시간에 잠깐 돌아와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차려놓고 다시 공장으로 갔다. 그리고 저녁 7시에 퇴근했다. 토요일에도 오후 5시까지 일해야 했다. 공장에서 먼지구덩이를 마시고 돌아온 엄마는 곧바로 식사 준비를 하고 가족을 돌보았다. 잔업이 있으면 야근은 다반사였다. 엄마들에게는 밤 8시 30분 드라마가 낙이었다. 새벽 일찍 ‘일하러’ 나간 아버지들은 달큰하게 취해 들어와 욕을 하는 게 일이었다.


대입, 졸지에 ‘엘리트’ 되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오후 3~4시쯤 엄마가 챙겨놓은 간식을 먹었다. 학원에 가는 아이도 있었지만, 학원에 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공부를 잘할 리 없었다. 남자아이들은 ‘삥’ 뜯고(뜯기고) 때리면서(맞으면서) 컸고, 담배도 술도 모두 일찍 배웠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비중이 다른 동네에 비해 월등히 많았고, 인문계 고등학교도 여러 가지 면에서 피곤한 학교였다. 아이들 대부분은 학원수업에 지쳐 학교에서 자는 게 아니라, 전날 밤 놀다 지쳐 수업시간에 잠을 자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울 4년제 대학을 다니게 된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한 반에서 5~10명을 제외하곤 서울 바깥으로 가거나 전문대에 진학했다. 그나마 전문대도 가지 못하고 그냥 일을 하기 시작한 아이들이 더 많았다. 나는 졸지에  ‘엘리트’가 되어버렸다.


대학에 들어가서 대학가에서 술 한잔씩 하고, 축제 다니는 게 대학교 친구들의 여가 생활이었다. 동네 친구들은 대학가에서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은 대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홍익대 주변과 신촌 그리고 대학로 등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친구들과 술자리를 했지만, 동네 친구들과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가던 프랜차이즈 술집에서 마셨다. 난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시작하고 소개팅에 나섰지만, 동네 친구들 대부분은 시급 ‘2천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20살을 시작하고 인터넷 채팅으로 번개팅을 했다. 피시방·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그나마 벌이가 좋다는 대형마트의 코너에서 일하거나 주차 관리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친구들은 20, 21살에 군대에 갔다. 제대해서는 ‘아차’ 싶어 전문대라도 가야겠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 갈 준비를 했고, 전문대에 가서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부모님 세대와 마찬가지로 동네 친구들은 20살이 넘어 ‘생활전선’ 바깥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힘들게 다닌 전문대에서 배운 전공 지식은 먹고사는 데 별 쓸모가 없었다. 미용기술을 배운 친구는 신용대부 업체에서 돈을 수금하러 다니고, 부동산학을 배운 친구는 ‘프로젝트 부동산’에 들어갔다가 땅을 못 팔아 얼마 지나 그만두고 감정평가사를 준비한다며 공부를 시작했다.


전문대들은 지하철 광고에 취업률이 90%를 넘는다며 광고하는데, 취업한 졸업생들은 다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그나마 ‘실기’로 뽑는 4년제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친구는 아르바이트하느라 적절한 ‘데뷔’ 타이밍을 놓치고 앞의 친구와 함께 감정평가사 준비를 시작했다.


투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


정치학을 공부하고 ‘운동권’ 언저리에 있었던 나는 친구들에게 ‘정치적 올바름’ 따위나 ‘민주주의’ 등을 말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회사에 들어간 친구에게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그 친구는 비정규직이었다. 선거 때가 되면 한나라당을 찍으면 안 되는 ‘정치적 이유’, 즉 민주주의나 인권이나 국가보안법이나 냉전수구 세력의 문제점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는 잠깐 주고받다가 ‘가방끈이 긴’ 내 일장연설로 끝났다. 몇몇 친구는 나와 술자리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만 길게 한다는 이유였다. TV에 나오는 ‘아이돌’이나 배우들 이야기, 음담패설 혹은 게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익했다. 웃음거리라도 생겼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투표한 적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투표한 순간은 군대에서 줄서서 ‘강제로’한 것이다.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지 않고 그냥 돌려서 찍었다고 한다. 제대하고서는 매번 투표하라고 종용하는 내 덕에 투표한 친구도 있지만, 투표를 못한 친구가 많았다. 한나라당을 찍은 것은 아니다. 노동운동가 손낙구씨의 말마따나 그냥 투표를 안(못) 했을 뿐이다. 밤새워 아르바이트하고, 휴무일과 상관없이 일해야 하는 일상에 투표까지 하는 건 애당초 무리였다. 공휴일이든 국경일이든 명절이든, 휴무일은 변변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에게만 휴무일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만 모른다


우리 시대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러 담론들이 있다. 아무리 일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게 만드는 불안정한 고용구조와 노동에 대한 <4천원 인생>이나 미국의 사례인 <워킹 푸어> 같은 책도 있다. 수십 권의 신자유주의 비판서가 출간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담론도 책을 읽거나 주간지 정도 읽는 사람에게나 스며든다. 한국인의 평균 1년 독서량이 10권이라는데, 동네 친구들은 3년에 책 한 권을 안(못) 읽는다. 문해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친구들에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담론이야말로 ‘먹물 티’ 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분석 또한 조명하는 사람들을 놓고 볼 때 기가 막힐 때가 많다. 양극화는 중산층의 붕괴를 지칭할 때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중산층의 붕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난의 전조를 파악한다. 그런데 애당초 중산층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몰락이 문제가 아니다. 떨어질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늘 불안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항상 지지리 궁상이던 자신의 삶이 아래 세대에게 당연히 유지될 것이라고 단정짓는 마음이었다. 지금 한국 서민에게는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 같은 삶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기적이 없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사회적 진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사그라져간다. 50~60대 서민층에게 그나마 계급분화가 크게 일어나기 이전의 향수인 ‘친목계’와 ‘동창회’ 정도가 남아 그들을 결속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큰 목소리로 욕이라도 할 수 있다.(2) 네트워크와 장소가 없는 젊은 세대는 간신히 좁은 방이나 피시방을 전전하기 쉽다. 삶의 구체적인 드라마에서부터 정치적인 주체성까지 가기에는 길이 너무 멀다.


습속이 된 비관주의


예전 같으면 그럭저럭 자식들 결혼시켜놓고 약간의 벌이로 두 내외의 생계를 유지했을 동네의 50~60대 부모들은 여전히 일을 한다. 자식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정권이 두 번 바뀌었지만, 점점 더 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 말고 그들에게 특별한 삶의 변화는 없었다. 기력이 달려 폐휴지 줍는 할머니·할아버지 나이가 되기 전까지 ‘악착같이 성실하게’ 돈 벌고, 보험에 들고, 연금을 더 부어야 한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다.


‘민주화’ 혹은 ‘정치적 참여’ 따위는 애당초 생경한 단어였고, 삶에 스며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들에게 TV에서 ‘즐거움’을 주던 유정현이 더 커 보인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로또 대박’이 나서 좋은 차 타고 좋은 집 사서 결혼해 살겠다는 친구들에게 ‘정치’는 그들의 삶의 드라마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비관주의는 이미 습속이 되어 있다. 그리고 현실이 불안한 ‘지금’이 비관주의를 강화한다. 베냐민 말처럼 비관주의를 조직해야 하건만 그 조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비관주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기는 할까.


글•양승훈 

서울 안암동에서 태어나 8살 때부터 면목동 근처에서 살았다. 대학원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있다. 인터넷 매체 <레디앙>에 글을 연재한다. 블로그는 http://flyinghendrix.net, 트위터는 @flyhendrixfly.


<각주>

(1) 중랑구는 서울에서 취업자 중 기능직과 단순노무직의 비율이 가장 높다. 블로그 ‘손낙구의 세상공부’(http://blog.ohmynews.com/balbadak/271506) 참조.

(2)  손낙구, ‘왜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하러 가지 않나?’, <오마이뉴스>, 2010년 2월 12일자 인터뷰. 더 자세한 내용은 손낙구,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후마니타스·2010)의 방대한 자료를 통해 확인한다.

(3) “상류층 출신 젊은이들은 중·하류층에 비해 든든한 가문이 있고, 교육도 더 잘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기회를 얻을 기회가 많다. 말하자면, 특권이 삶을 전략적으로 고민할 필요조차 없게 만드는 셈이다.”(리처드 세넷, <뉴캐피털리즘>, 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9,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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