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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따르려고만 했지, 믿지는 않는다 [죽은 행동]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01 조회수372 추천수2 반대(0) 신고
 
 
양심이 있다면
 
 
'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화요일 복음 /  마태오복음서 25, 7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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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유혹자의 시험을 이겨내는 것은 '인간적 논리'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힘' 이었다

 

신앙 = 믿음

지금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유혹이 와 있다. 우리 자신의 '신앙 전통'에 대해 시험이 다가 왔는 것이다. 상대는 가톨릭 신자의 약점을 노리고 좌우로 시험을 진행해 간다 하겠다. 가톨릭 교회 자체는 강하지만 교회의 신자들은 약하다. 상대는 그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 그렇다고 상대가 가톨릭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가 간파하고 있는 점은 가톨릭 교회 신자들이 부실하다는 측면을 파악했다 할 수 있다.

그런 점을 파고 들어온다. 신자들이 미처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여러 부분들을 아니면 평소의 반향적인 면들을 드러내어 건드리면서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신앙마저 흔들고 있는 유혹이다. 가톨릭 교회 자체는 강하겠지만 그 신자들은 허약하다. 이로써 가톨릭 신자들은 '무진공 상태'로 빠질 수도 있다. 물론 몇몇 분들은 신앙의 유산들을 지키려고 애쓴다. 반대로 그들과 편승하여 연합하는 이들도 있다. 세상 때문에 평소 가톨릭 교회에 대한 숨겨진 반향심으로 신앙을 잊고 세상과 야합하기 때문이다.

자신 조차도 잘 알지도 못하는 부분들, 그리고 반향점들을 상대가 살짝 건드려 주자 단번에 그들 상대와 함께 손을 잡고 나선다. 자신들도 상대와 똑같은 인간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에 대해 많은 것들을 못 배워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 이다. '믿음의 순종'이 허술하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표현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 안에 있지만 사실은 교회 밖에서 서성거리는 이들이다. '믿음의 순종'에 대해서도 못 배워서가 아니다. 세상 논리에 따라 잘못 배워서 '이탈' 되어진 상태이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세상과 영합하는 자들이며 이미 세상과 타협했었기 때문에 상대와 '믿음의 순종'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는 이때가 그 '순종의 의미'를 발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믿음은 이런 때에 순수하게 단련이 되어지는 것이다. 아니면 상대와 함께 시험의 유혹에 동조할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믿음은 유혹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 마련이다.

 

행동하는 믿음  <과>  믿음있는 행동

흔히,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을 이야기한다.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행동'은 믿음이 없는 행동을 말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행동을 의미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행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인간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다. 이런 행동은 '양심의 행동'이지 '믿음의 행동'은 아니다.

'믿음의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믿음 안에서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곧 진리의 행동이 아니라면 그런 행동은 인간중심적 행동이다. 인간중심적 행동이란 자기 위주의 행동을 말한다. 타인의 인격과 의견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양심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중심적 행동의 부류는 사회 조직(회사)에서 언제나 도태되고 만다. 자기 주장만 옳고 타인을 헐뜯기 때문에 그를 멀리하는 까닭이다.

인간중심적 행동은 누구나가 자기위주의 행동이다. 하지만 '믿음의 행동'은 인간중심적인 자기 양심 위주의 행동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말씀 위주의 행동이다. 말씀을 믿는 것을 믿음이고 이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결코 순종할 수 없다. 다시말하면 '믿는 말씀'을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씀을 믿기는 하지만 실행하지 않는 것을 '불순종'이라 할 수 있고,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을 두고 '순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행동하는 믿음'이라기 보다는 '믿음있는 행동'이라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행동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말씀을 행동(실천)에 옮기는 믿음인가. 말씀은 믿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닌가. 행동하는 것만이 믿음인가. '거짓 행동'하거나 믿음이 없는 행동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행동은 하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가. 사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행동하는 이들이 더 많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인간적인 자기 위주의 행동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하느님의 말씀 없이 동양사상, 서양철학, 등등 자신의 개똥철학으로 자기 위주의 행동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의문투성이고, 의혹과 의심으로 가득찰 수 있다. 인간 자기 중심이니 어찌 하느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까. ... 그러므로 행동에도 '산 행동'과 '죽은 행동'이 있다고 하겠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그 행동은 '산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 양심위주의 행동, 하느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창세기의 뱀에게 이야기 듣고 자기 양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고 뱀의 말(논리)를 따라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죽은 행동'인 것이다.

'산 행동'이란 하느님의 말씀(생명)을 믿는 행동을 말한다. 생명이 있는 행동을 해야지, 뱀이 지닌 죽음의 말을 듣고 뱀의 말에 따라 "죽지 않는다"라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면 뱀의 말을 믿는 것이지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게 아닌 것이다. 그런 뱀의 말을 따르는 행동은 '죽은 행동'이다. 생명의 행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순종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바로 '산 행동'이다.

'죽은 행동'을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동은 하지만 죽은 행동을 하기 때문에 결국 '죽는 믿음'인 것이다. 인간중심에 의거하여 정의를 내걸고 '죽은 행동'을 하는 믿음없는 행동주의자들에게는 본받을게 없다 그런 단순한 '행동주의자'는 언제나 자기 위주의 '편협된 이념'이 강한 편에 속한다. 그 이념으로 남을 해치기도 하며, 결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못한다. 이념이 강하여 자기 회개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행동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믿는게 믿음이고, 이 믿음을 실행하는게 순종이다. '믿음의 순종'을 말한다. 살아있는 행동을 하는 믿음, 곧 산 믿음은 '믿음의 순종'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자기 사상, 이념, 철학 따위에 근거하는 행동은 하느님과 상관없다. 하느님과 상관없다면 믿음과도 상관없다. 그런 '행동하는 믿음'은 겉보기에는 양처럼 보이나 속은 사상이념에 게걸들린 이리 떼와 같다. 언제나 등불을 켜고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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