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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롭던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다 [삼민투와 거지 사랑]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04 조회수345 추천수1 반대(0) 신고
 
 
옛날에 대학교(동아대학교, 84학번)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딘 청년기 때에
가장 친하고
사실 어려운 처지 속에서
함께 사회 생활을 해갔던 친구가 있었다.
그런 친구하고는 우정 때문에
이념문제나, 종교문제 등
인간에게 있어서 날카로운 이야기들은 서로 피해간다.
 
물론 대학교 시절에서는
공유하는 이념이 같은 이들과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서로 위로해 가며 가슴을 보듬고 상호 독려하면서
이념과 정의에 대하여 날카로운 각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마다 성향이 다를 수 밖에 없는 터라
결국 상호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이념 때문에 만나서 이념 때문에 갈라져야 했었다.
그 이후로 이념문제나, 종교문제에 대하여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아야 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중년이 되었고
여기에서 지난 과거의 일들을 회상해 보면
암울했던 그 때의 시기에 비하여 참으로 '좋은 환경' 안에서
이념과 정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을 본다.
물론 겉핧기식의 그러한 논의들이지만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결코 처절하게 투쟁할 수가 없었던 시기와는 다르다)
세상을 향하여 걸어가는 이들의 '소금같은 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겉핧기식의 '논투'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안다.
자신들의 감정만을 드러내고자 열혈적으로 나서는 이들도 그 때는 많았다.
그들은 입은 살아있다.
그래서 지원 행동을 받는 데에는 그들이 도움이 되었고
환호와 박수를 쳐 주는 이들도 다름아닌 그들 뿐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필요한 존재들로 항상 남아 있게 되었다.
 
앞서 가는 사람들과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은 확연하게 분리된다.
입으로 지원해 주는 사람들,
손(박수)과 발(행동)로 지원해 주는 사람들,
멀찌감치 떨어져 환호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앞서 가는 사람들은 "깨어있는" 사람들이었다고
그 때는 그렇게 말하였다.
그들과 우리는 '하나' 됨을 언제나 인식해야 했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야 했다.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수단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의> 라는 것이었다.
입으로, 손과 발로 따르는
지원자들에게 이념을 가르치고, 이념을 알려 주어야
지속적인 '하나'의 힘으로써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념을 주입시키지 못하면 <민의>라는 힘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힘이 지속으로 남아 있으려면 이념이라는 기름이 떨어질 경우
마침내 변화시키는 불꽃이 꺼져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그들은
결코 해방될 수 없음에도
해방되어진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에 이념의 주입이 필연적이다.
해방되어진다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면
이념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되어 힘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념은 반드시 필요하다.
해방을 위해 이념은 사용되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결국
이념은 목적으로 바뀌고 인간은 수단으로써
변질되어 새로운 세상으로 형성한다.
바로 '이념의 세상'이다.
인간은 이 '이념 세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념이 점점 분화하자
문제에 대하여 접근하는 정신까지도 예리해 지면서
날카로운 이빨을 지니게 된다.
이념은 인간을 '사나운 이리 떼'로 변형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흔히 '조용한(젊잖은) 이념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이념 감흥'에 도취 되어져
이념의 나르시스에 자기 자신이 빠지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특히,
이념 자체를 악용하는데에도 대단한 소질을 발휘한다.
이념우월주의, 이념지상주의 상태로
인간의 정신을 매료시켜
현실까지 '이념화' 시켜 버리고 만다.
<민의>의 힘이 아니라
<이념>의 힘으로 사회 변화를 지향한다.
한가지 예를들어, 교회적인 측면에서 보면
'사회 교리'에 이념을 적극적(이념 우월주의, 이념 지상주의)으로 개입시키려는 것이다.
사물(현실)의 변질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해독이 된다.
이념의 매력은 '이념의 나르시스'에 수많은 사람들(대중들)을 매몰시켜
어떠한 현실(종교와 세상 , 교회와 사회)과도 동떨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찌하든,
이념 자체는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지며
인간을 이념의 수단으로 변질시킨다는 점이다.
이념으로 지원을 받는 도움도 있고
이념으로 '변혁의 힘'이 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인간 자체는 '이념의 도구화'로 변형되어 갈 뿐이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롭게 여기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그 자체에 목적을 두고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게 하지만 (인간 세상, 사람 사는 세상)
 
이념은
이념 세상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고
세상이 인간을 대신하여 살아가게 한다. (세상 인간, 세상 사는 사람)
사람이 세상을 사는게 아니라,
'세상에 사람이 사는 것'으로 그런 의식이 작용되어져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비판하기 위한 도전(이념의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결국 해로울 뿐이다.
'인간 세상' ( 사람 사는 세상 )이 되어야지
'세상 인간' ( 세상 사는 사람 )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념에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계속>
 
'빈자의 그리스도 = 거지의 사랑' 이다. ( 거지 하느님의 거지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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