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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와 해방----<뿌스띠니아> 중에서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06 조회수364 추천수2 반대(0) 신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2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내가 몬트리올의 샤를르 드 푸코의 작은 자매회(the Little Sisters of Charles de Foucauld)의 뿌스띠니아에 있는 동안 나에게 던져주신 화두(話頭)인 자유(freedom)와 해방(liberation)은 간단한 것 같지만 매우 복잡한 뜻을 갖고 있었다. 이 때 이후로 나는 이 두 단어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 두 단어를 가슴에 새기고 이 두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고 매달렸다.
하느님께서 땅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만드시면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하느님과 비슷한 모습을 만드신 이유는 사랑과 자유밖에 없지 않은가? 하느님께서 자유의지로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자유의지도 주셨다.
나는 신학자가 아니라 한낱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려고 애쓰는 사람에 불과하다.
성경에 쓰여 있는대로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비슷한 사람과 “무언가를 이야기하시고자”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을까? 사람들이 마음 놓고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매우 사랑하셨다. 창조의 행위는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행위보다 사랑의 행위를 훨씬 더 소중히 여기셨다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한 희생양으로 보내셨다. 우리가 자유를 잘못 이용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고통 받는 종은 어떤 면에서 교량 역할을 하셨고 우리들이 자유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셨다.(이사야 42:18-25) 이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이 더욱 더 커지게 되었고 자유의지와 자유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히 하느님께서 내가 마음 대로 선택하기를 바라시는 즉 하느님의 의지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 “예”라고만하지 않고 “아니오”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면에서 그 자유는 무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을 더 깊이 할수록 하느님께 “예”뿐만 아니라 “아니오”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나는 세례를 받고 주님처럼 죽고 다시 살아났으므로 나는 하느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의 자매이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도 나는 하느님의 모습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나는 그런 힘이나 자유를 갖고 있었다.
나의 손으로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나는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은 무언가를 쥐는데 쓰이므로 나의 손을 바라보니 나의 손은 자유를 쥐고 있었다. 나는 나의 손이 쥐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밤 늦게까지 오래 동안 묵상하였다. 아울러 나는 무엇이 죄인가하는 것도 깨달았다. 죄는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아니오”하고 매몰차게 거절하고 하느님이 아닌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나는 마음대로 죄를 짓고 ‘아니오’하고 말했지만 죄는 나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다. 내가 ‘아니오’라고 말해도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반면에 내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예’라고 말해도 어떤 일이 생겼다.
나는 석양 속으로 걸어갔다. 내가 절대자를 향해 순례여행을 할 때 어둠 대신에 빛이 충만했다. 내가 ‘예’라고 말했을 때 이 나의 자유는 하느님과 함께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오늘은 “나는 춤의 왕이다”는 노래가 들려왔다.*(注) 나는 마치 “나는 노래의 왕이다”하고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예’라고 말하고 나의 자유를 이용하여 진정으로 자유로우면 노래와 함께 모든 창조물이 하나가 된다.
내가 자유에 대하여 더 많이 묵상할수록 더욱더 내가 자유로운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으로 내가 자유로웠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묵상을 한 것도 내가 자유롭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나를 나의 등을 떠밀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묵상 시에 샘삼스럽게 나는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있고, 성사(聖事)에 참여하고 교회의 삶을 산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자유라는 선물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하느님께서 여기 계시지만 나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하느님을 향하여 뜨거울 수도 있고 냉정할 수도 있고 미지근할 수도 있다.
비록 나는 자유로운 대신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나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고 이 자유 때문에 기뻐고 하느님께 감사한다.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렇다. 충고하는 사람이나 영적지도자를 찾아가거나 영적인 책을 찾을 수도 있지만 또 내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때가 되면 나 혼자서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유를 주셨다. 나는 조금 더 깊이 묵상했다. 실제로 묵상이 끝나고 고요함이 나의 영혼과 마음에 찾아왔다. 그 고요함, 하느님께서 내가 그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하시어 스스로 조용하게 된 침묵 중에 시야가 넓어지게 되었다. 나는 먼저 비길 데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한 쪽 편에 있는 사막을 보았다. 나의 생각을 꽁꽁 묶어 그의 생각대로 하려고 하는 마귀가 날뛰는 사막을 보았다. 다른 한 편에는 삼위일체가 계셨다. 흰 비둘기 모양의 성령, 사랑의 하느님께서 마치 거대한 불새처럼 나의 위를 돌아 다니셨다. 그러나 분명히 새는 아니었다. 불을 새로 잘못 본 것이었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옆에 게시면서 평소처럼 아버지께로 나를 인도하셨다. 내가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할수록 나는 더 지치게 되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하고 단조로운 것 같았다. 이런 단조로움을 우리는 가장 싫어한다. 한 쪽에는 불타는 사막이 있었고 다른 쪽 사막에서는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중간에 서 있었다.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오른 쪽으로 가든지 나의 뜻 즉 마귀의 뜻인 왼 쪽으로 가든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 광경이 너무나 뚜렷했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다. 나는 혼란 속에 빠지고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마귀가 나의 뜻대로 하도록 부추겼다.
그런 다음 갑자기 잡념이 사라지면서 오로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택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주셨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면 당신의 뜻대로 하는 것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당신의 아드님을 무엇을 하러 내려 보내셨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요청에도 강요 받지 않고 자유로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셨다. 나도 예수님처럼 자유의지를 갖고 강요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 마음은 깨끗해졌으며 나는 묵상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여동생이다. 그렇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태어났다. 그렇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결심했다. 나는 나의 피앗(fiat)을 계속하여 되풀이하겠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함께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상하고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다가왔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으므로 나는 하느님 아버지와 부모 형제 친척에게 나의 모든 것 그리고 나의 삶을 모두 맡겼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뜻을 그리스도의 하해(河海) 같은 뜻에 맡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무화(無化)가 된 것처럼 느꼈으나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마치 나의 뜻뿐만 아니라 나의 몸과 마음 감정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나는 무화에서 빠져나와 나 자신을 보았다. 나의 눈이 빤짝거리면서 내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진정으로 나는 자유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나는 새와 같으며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고 나도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의 것처럼 느꼈다. 이제 나는 해방되었다. 나는 공기처럼 자유롭다. 나는 모든 것을 가졌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가지셨다.
이제 나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의 뜻에 녹아버리고 나의 영혼에 이상한 불이 들어 올 것이다. 이제 하느님께 자유로이 맡긴 뜻이, 하느님을 섬기면서 그리고 교회 안에서 기쁘고 환상적인 열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제 당신 자신을 ‘춤의 왕’이라고 부르시는 그 분의 걸음을 걸으면서 그분을 찬송하고 세상에 음악을 에코로만 주신 그분과 함께 걸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은 하느님의 음악의 에코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은 사랑때문이다. 믿음의 선물로 사랑의 선물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사랑과 믿음 속에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고 소중해졌다. 나는 당신께 듣지 않아도 듣게 되고 보지 않아도 보게 되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께 인간의 올바른 선택의 결과 즉 해방의 선물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나는 자유입니다. 이제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왜냐하면 저가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겼고 저가 모든 것을 맡길 때 저를 구속하고 있던 모든 것이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자유롭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되면서 저는 날아오르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는 매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것입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그 뒤부터 뿌스띠니아는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뿌스띠니아로 가기로 결정한것은 바로 나였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나의 자유의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이제 보십시오. 저는 전혀 강요 받지 않고 자유로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멀리 가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뿌스띠니아가 당신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저의 자유의지로 당신께 더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뿌스띠니아에 머물고 계신다면 해방(liberation)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와 해방은 어떻게 다를까? 해방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자유이다. 곧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만든다. 내가 뿌스띠니아에 가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가톨릭과 하느님을 더욱더 믿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 나의 자유의지였다.
그러나 해방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태까지 고생했으므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되게 나를 너희에게 주겠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헤어나지 못했던 모든 일’에서 여러분들을 해방시키셨다. 이제 그 고민에서 헤어나게 되었다. 그 고민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이 하느님의 선물로 해방되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해방시키신 것이다.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괴롭힐 수 있지만 나의 평화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해방시키셨다. 나는 순전히 나의 자유의지로 하늘나라를 돌아다니는것 같다. 나는 순례의 길에서 만난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별력의 선물을 주시어 제6감처럼 되었다. 과거에는 삶이 무겁고 무척 어려웠지만 이제는 가볍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해방의 선물의 일환으로 지혜의 선물도 주셨다. 특히 인간과 관련된 분별력과 지혜의선물이 나를 약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뿌스띠니끼는 이러한 것을 자기 힘으로 이루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으며 자유의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뿌스띠니끼가 뿌스띠니아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과 직면하게 된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 직면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를 더럽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을 싫어한다. 뿌스띠니끼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기 위하여 자유의지로 뿌스띠니아에 들어간다. 자신의 내면과 직면하는 것을 가로 막기 위하여 많은 일들 특히 마귀가 뿌스띠이나를 떠나도록 강요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뿌스띠니아에 들어가는 것은 하느님의 궤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느님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유혹에 빠지거나 뿌스띠니아에서 도망치거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자유이다.
이 자유만 있을 뿐 뿌스띠니끼에게 요구하는 규칙은 아무 것도 없다. 뿌스띠니아에 머물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뿌스띠니아는 분별력이 생기는 곳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하기를 바라지만 여러분들은 마음으로 어느 것을 해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여러분의 삶은 공동체에 봉사는 것이었지만 최소한 여기서는 여러분 자신의 에고를 만족시켜서는 안 된다. 뿌스띠니아의 정수(精髓)는 자유이다. 여러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이 이끄는 행동의 완전한 자유이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여러분의 마음에 물어보아라. 여러분의 머리를 마음에 집어 넣고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하든지 하느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여러분의 의무를 알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런 자유를 가졌듯이 뿌스띠니끼는 모든 것에 복종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때에는 기쁨을 갖고 봉사해야 한다.
뿌스띠니끼는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의존하므로 절대로 안전하지는 않다. 하느님께서는 3분마다 우리의 삶을 뒤흔드신다. 사람들은 누구나 무사안일을 바라므로 안정을 잃으면 당황한다. 그러나 뿌스띠니끼는 필요하면 규칙적인 그의 생활을 깬다. 내가 뿌스띠니아에서의 사흘을 말할 때 여러분들이 거기서 석 달이상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뿐이었다. 뿌스띠니끼는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자유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같은 자유가 있다. 그리스도는 뿌스띠니아에 계신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뿌스띠니아에 왔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름을 붓고 향유를 부어 여러분을 이끄신다. 때로는 이 이끄심이 너무나 강력하여 여러분들이 거의 감지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긍적적인 이끄심과 더불어 항상 반대되는 이끌림도 있다. 그래서 나는 뿌스띠니아에 있을 때 매 순간 그리스도를 향하거나 그리스도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나의 자유의지를 발동시켜야만 했다. 뿌스띠니아는 그리스도의 이런 이끄심을 언제나 제공하는 새로운 차원을 제공한다.
뿌스띠니아에는 어둠도 찾아온다. 나는 지금까지 빛 속이나 여명 속에서 걸어왔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사리를 분별할 수 있었다(나는 눈으로 보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갑자기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Cross)이 말하는 어둠과 직면하였다. 나는 그 어둠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뿌스띠니끼는 보통 어둠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꿋꿋이 서서 자유롭게 그 어두운 밤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도망치고 싶은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영적인 지도자가 필요한 때였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다 대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내 마음 대신에 머리로 처리하고 싶어했던 시기였다. 수많은 세력들이 내가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여러분은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을 받고 난 다음에는 하느님의 은총(해방의 선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자유의지(자유)에 따라, 강요 받지 않고 어둠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여러분 자신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전혀 내적인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여러분 때문에 기분 나빠하실 것이라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믿음으로써 자유를 갖게 되고 하느님께서 결코 여러분 때문에 속상해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유혹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지금 뿌스띠니아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할 것이다.” 혼동은 언제나 마귀로부터 온다. 이런 생각은 여러분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것 같지만 제한한다. 마귀는 여러분에게 이미 올가미를 씌우고 있다. 뿌스띠니아에서는 신경과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코 죄의식을 갖거나 자기 합리화를 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자유로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두운 밤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 정신을 차리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여러분의 지식의 날개를 완전히 접어야 할 때이다. 동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보다 고통에 더 익숙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면 마음을 비우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바보들(fools)만이 이 어두운 밤으로 걸어 들어가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다(영어로는 미친 사람, 제 정신이 아닌 사람, 생각이 없는 사람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면 무(無)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빗장을 조금 걸어 잠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지식의 날개를 접을 수 있었고 나 자신을 조금 더 비울 수 있게 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나는 심연으로 뛰어 들어가 나의 먹이를 잡았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뿌스띠니끼는 심연으로 뛰어들어가더라도 반드시 먹이를 잡을 필요는 없다. 그래도 뿌스띠니끼는 무(無)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러분의 생각과 예전의 모든 생각을 버리는 것은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無)가 여러분을 붙잡으면 또는 여러분이 무에 붙잡히도록 허락하면(나는 어느 쪽인지 모른다), 갑자기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싸르트르(Sartre)도 무(無)로 향하여 가는 것에 대하여 많은 말을 했지만 실제로 싸르트르는 무(無)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의 무(無)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면 절망이며 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무(無) 안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찾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무(無)의 순간이 오게 된다. 마치 백치(白痴)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순간이다. 자신이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오로지 어둠만 인식하게 된다. 자신의 믿음이 깊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전혀 태어나지 않은 듯한 순간이다. 이 어둠에서 빠져나오면 바로 기도를 하게 된다.
이 무(無)의 순간은 너무나 짧다. 느끼는가 싶은 순간에 끝난다. 바로 그 뒤에 기도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아주 이상한 기도가 된다. 내향적인 수동성(interiorized passivity)이 생기게 되므로 기도가 아닌 기도가 된다. 자신이 걷거나 자는 등의 어떤 행동도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이제 자신이 엄청나게 변했다. 이제 자신의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즉 자신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해방의 경지이다. 여태까지는 자유만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제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느님께 맡겨버린 상태이다. 이제 하느님께서 떠맡으셨기 때문에 진정한 해방이 시작된다.
가지 않으려고 여러번 발버둥치게 되지만 성령께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야만 한다.
우리는 성령께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잘 안다. 왜 그럴까? 성령께 완전히 자신을 맡기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특히 뿌스띠니아에서는 하느님께 완전히 맡기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신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것이 성령께서 여러분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들어가실 때라는 것이다. 성령의 불로 우리의 잘못된 영혼을 태워 없애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지금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모든 뿌스띠니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완전히 태워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못된 나의 영혼을 태워 없애시려고 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두 태워 없애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뿌스띠니아에 머물고 있어도 이런 반항이 계속 되게 된다. 하느님은 너그러우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우리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태우시려고 하시지 않는다.
자신이 성령께 이끌려서 빛을 보게 될 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지혜에 너의 뿌리를 깊게 박아라. 지금이 그 기회이다. 너에게 지혜의 선물을 준다. 지혜는 나의 것이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싶다. 나는 이제 너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나의 친구, 상속인이라 부르겠다. 너는 내 아들의 형제자매이다. 그러니 지금 너의 뿌리를 지혜에 깊이 박아라.”
여러분은 하느님께서는 아무 대가를 바라시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하느님께서는 억지로 그 일을 하도록 강요하시지는 않는다. 그러니 뿌리를 깊이 박아야 한다.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여러분에게 분별력이 생겼다. 이제 비로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사람이 원하는 것과 네가 원하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이런 재능을 갖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재능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주);
<춤의 왕(The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시드니 카터(Sydney Carter, 1915-2004)의 곡)>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
내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도 하늘의 춤을 추었다.
춤추어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추어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희를 인도하련다.

높은 양반들 위해 춤을 추었을때 그들은 천하다 흉보고 비웃었지만
Lord of the Dance )
어부를 위해서 춤을 추었을 때에는 나를 따라 춤을 추었다.
춤추어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추어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희를 인도하련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춤추었더니 높고 거룩한 양반들 화를 내면서
나를 때리고 옷을 벗겨 매달았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
춤추어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추어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희를 인도하련다.

높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춤을 계속해 추기란 힘이 들지만
끝내 땅 속에 깊히 묻힌 이후에도 난 아직 계속 춤춘다.
춤추어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추어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희를 인도하련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좋아 날뛰지만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내 안에 살면 나도 너희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살련다.
춤추어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추어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나는 춤 속에서 너희를 인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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