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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께 되돌아 오지 않는 아홉사람 [기독교 증언] 보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09 조회수348 추천수3 반대(0) 신고
 
 
ㅡ 수요일 복음 말씀 중에서 ㅡ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복음서 17, 15 - 16>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복음서 17, 18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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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 ...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루카복음서 7, 50 > 이 말씀은 예수님께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부어 발라 준 죄많은 여자의 이야기에서 기록되어진 말씀이다.
 
사람들 중에는 상대방에 대한 감사함이 넘치면 차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감사의 보답으로 무엇으로 어떻게 해 드려야 할런지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의 일이다. 그렇게 안절부절 하다보면 상대방은 언제나 마음을 편히 가져라고 도리어 격려해 준다.
 
"일어나 가거라", "평안히 가거라"는 말씀도 그러한 의미이다고 본다. 타인의 선의에 대한 감사는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이며 자기 양심의 당연한 표현이다. 그리고 선의를 베푼 이가 그 감사를 소중히 받아들이고 답례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겠다.
 
인간의 양심으로서 서로간에 영광을 주고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일에는 우리 모두 소홀함이 조금씩은 남아 있다. 인간의 양심으로 인간 사이에는 그런 '인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데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는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그분에 대하여 분석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그분의 말씀에 무엇이라도 흠을 잡아 보고자 깊이 연구해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대중들에게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어 보이고 대중들에게서 대단한 통찰력의 소유자로 인정을 얻고자 자신에 대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그분을 반대하는 많은 유대인들과 율법주의자, 바리사이들,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옭아 맬까 해서 그분에게 질문하고 그분의 입에서 대답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예수님 앞에 서기도 했다. 흔히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약점을 찾아내려고 그분의 말씀에 주시했던 것이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비난하기 위해서 그분의 말씀(곧, 복음 성경)을 들었던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어떤 이의 약점을 살피기 위해서 그가 말하는 것들에 귀를 쫑껏 세우는 경우가 흔히 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성심껏 경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상대를 비난하기 위해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게 아니다. 특별한 믿음의 실천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조롱(비아냥거림)하며 비난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바'들을 샅샅히 분석하려는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오늘 현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의 현상이다.
 
다른 이들의 말하는 바(글, 문귀)를 자신의 겸덕으로 잠잠히 경청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옭아 매어 비난하고 조롱해서 그를 무너뜨릴까 하는 '속이는 영'들이 있다고 하겠다. 신앙의 믿음 보다는 정신의 작용을 더욱 신뢰하면서 오직 방어와 공격을 위한 자신의 지식(이념 따위)을 견고한 성처럼 쌓아 올리는 형상이 어느 시대에서나 엄연하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은 행위
 
"그대가 자기의 것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
<로마서 14, 22 - 23>
 
행위없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없는 행위, 곧 죽은 행위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 17) 하지만 그 실천이라는 행동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이념에서 근거한 양심적 소신)에서 발휘되는 행동이 예수님의 복음과 성경 말씀에 대한 믿음과 상관없는 행동이라면 '산 행동'이 아니라 '죽은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념에는 생명이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서)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지혜(이념 사상)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예수 그리스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1코린토서 2, 5 참조) 인간 상호간에는 인간적 양심으로 서로에게 감사하고 서로의 인덕으로 행동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비아냥거림은 그분(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이들은 말씀에 비아냥거림의 의문투성이 보다는 인간의 바른 양심으로 말씀을 바라 보면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되는 법입니다. 비록 사마리아인이라도 인간 서로에게 감사할 줄 알거든 하물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가 있다면 믿음의 은총이 가득차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하느님에게서 난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1코린토서 1, 24>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곧, 말씀을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신화다" 라는 신념을 지닌 자들은 말씀에 대한 믿음마저 자기 이념 안에서 사실 죽은 것이 됩니다.
 
 
예수님 없는, 예수 사상
 
예수님 없이, 예수님의 말씀만을 자신의  정신 속에 가져와서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온갖 이념과 함께 절충하여 섞어서 자신의 이념을 구성시킨다면 예수님 없는 예수 사상을 소유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 이념에서 행동하는 믿음없는 행동은 '죽은 행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없는 예수 사상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믿음'이 겉으로는 마치 '살아있는 믿음"처럼 대중들에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게 아니라, 어떤 한 인간( "준자" 이야기 )을 전하는 것이며, 어떤 한 인간을 맹종하도록 선전하는 것이고, 이는 바로 이념 사상을 대중의 옷으로 입히는 것이다 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예수님께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아래에 진심으로 엎드려 감사와 찬미를 드릴 줄 모르고 그분의 교회와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선택되어진 추기경님께 의심과 반목으로 항상 대결하면서 신자들에게 적개심만을 보여주고 그런 글로써 나타낸다면 차라리 그 사마리아인 한 사람 보다도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을 삶의 여정으로 걸어가는게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생명을 추구하겠다는 '오체투지'의 이념으로 인간의 힘을 발휘해 내는 인간의 정신에서는 결코 예수님께 되돌아 올 수(회귀, 믿음)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지 않는 이념 세상에서는 인간은 참으로 진정한 평화와 생명( "일어나 가거라, 평안히 가거라" )을 얻지 못합니다.
 
쇄신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은 행동'의 이념 보다는 '산 행동'의 십자가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코린토서 1, 18> 이념적 행동 양심이 아니라, 예수님께 되돌아 오는 십자가적 믿음 행동이 더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믿음의 행동은 사랑, 사랑의 뿌리는 믿음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에 관하여 친히 증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에 관하여 하신 증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증언은 이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이 당신 아드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아드님을 모시고 있지 않는 사람은 그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요한서 5, 9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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