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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한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0 조회수795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2 주간 목요일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나라


 

오헨리의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번쯤은 읽어보시거나 내용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줄거리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부유하지 못한 한 부부에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습니다. 돈은 없지만 그래도 둘은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어 했죠. 선물을 살 돈을 마련하기위해 서로는 자신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자신의 자랑거리를 팔고 돈을 구합니다. 아내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가발상점에 팔고 20달러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1달러 87센트(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로 선물을 사러 갑니다. 그리고 남편이 가지고 있던 시계에 달 금시계 줄을 21달러에 삽니다. 한편, 남편은 할아버지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던 소중한 시계를 팔고, 아내의 머리카락에 꽂아줄 비싼 머리핀을 삽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서로에게 선물을 줍니다. 비록 필요 없는 선물이 돼버렸지만 두 사람에게는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좀 진부한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만듭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을 하면 자신을 잊고 그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주고받을 때 가장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사실은 복음의 전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어놓으셨고 인간은 그 은혜에 보답하여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이 모두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하느님나라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찾아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나라는 눈에 보이는 왕국이 아니라 ‘사랑으로 느끼는 행복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나라가 눈에 보이는 나라라면 우리가 찾아 나설 필요가 있겠지만, 하느님나라는 우리 마음속에 있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아니 사랑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고 하느님나라나 예수님을 보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다닐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아주 작지도 혹은 아주 크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아주 작아지거나 아주 커지면 사람은 그것을 보거나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사막에 나가면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본래 소리가 크기 때문에 인간이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주 미세한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도 듣지 못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균처럼 아주 작아도 안 보이고 우주처럼 아주 커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보다 크신 분입니다. 따라서 그 분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그 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마치 공기와 같아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보이지 않는 공기 안에서 숨을 쉬며 살듯이 우리도 그 분을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나 사랑이나 하늘나라의 행복이란 것이 결코 모호한 무엇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이지 않으면 보거나 만나거나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남겨놓으신 계명을 지키면서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의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요한 2,5)

따라서 계명을 어기며 죄를 짓는 누구도 하느님나라의 행복 안에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겉으로 못된 사람들이 잘 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믿지 마십시오. 그 안엔 지옥이 있고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평생 성인이 느끼는 단 한 시간의 평화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를 이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1요한 4,7)

 

하느님은 온 우주보다도 크신 분이시지만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 안에서도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주님을 보거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한다

 

제가 주제를 잡고 논문을 쓰고 있는 신학자는 이미 고인이 되신 발타살이라고 하는 독일 신학자입니다. 물론 그 분은 추기경까지 되시고 바티칸에서 오랫동안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힘쓰셨습니다.

신학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위대한 신학자이지만, 요즘엔 그 분 신학에서 정통 가톨릭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을 여럿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굉장히 존경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분 신학에 대해 비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95%이상은 다 옳은 말이고, 또 아직 그 분 신학에서 더 많이 배워야 함에도,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 몇 개만 잡아서 그 사람 전체를 깎아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쓰며 어쩔 수 없이 그분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느끼는 것은, 은근히 ‘내 신학이 이 사람을 뛰어넘었다.’라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상대를 낮추는 것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서로서로에게 핑계를 대었던 것처럼, 내 자신을 정당화하기 가장 편한 방법이 상대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는 생명의 양식이 될 성체성사의 예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살을 먹는다는 것도 말도 안 되고, 모세 율법에 금지된 피를 마시는 것도 제정신인 사람이 할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며 그 분을 떠나갑니다. 이렇게 떠나간 사람들이 나중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래야 자신들의 생각이 정당화되고 예수님보다 높아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남은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떠나가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아마 스승이 이상한 말을 하고 배척받는 것을 보는 것도 제자들에겐 쉽지 않았겠지만, 베드로가 나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고 계신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가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사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우리 개인과 한 몸을 이루는 혼인의 신비를 세우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떠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이성을 뛰어넘는 것이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 하시는 말씀이 워낙 어처구니없게 들릴지라도 그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 분이 하는 ‘말씀’까지도 일리가 있는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부모가 옳은 말만 하고,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모가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도 나의 부모이고 그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 사람이 하는 말 한 두 마디만 가지고 상대를 다 아는 것인 양 판단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운명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척하는데 내가 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베드로처럼 교회를 믿고 교회의 가르침이라면 이해할 수 없게 들리는 말일지라도 일리가 있을 것이라는 겸손과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도 그분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고난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겨야합니다. 예수님을 배척했는데 그 제자들을 배척하지 않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도 배척받지 않으려고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것을 더 부끄럽게 여겨야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운명은 이해받지 못하고 배척받으셨던 그리스도의 운명과 같아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를 배척하고 떠나가고 그를 깎아내림으로써, 예전에 예수님께도 그렇게 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닮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 먼저 살펴야합니다. 자칫 교회의 한 사람을 비판하면서 교회 전체와 맞서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나의 하느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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