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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은 저들의 세상입니다! 내일은 우리들 세상입니다!>
작성자장종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3 조회수285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은 저들의 세상입니다! 내일은 우리들 세상입니다!>


욥기 해설 끄트머리를 따서 붙입니다.

아래 시는 타고르 시입니다.


“주님이시여. 피 묻은 발로 싱그러운 녹색 땅을 밟고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거만하게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들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몫은 버거운 권력 아래서 고통 받고 신음하면서 여태껏 얼굴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울음을 삼키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 고통스런 떨림마다 깊은 밤 당신께 울렸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욕마다 당신 큰 침묵이 받아들였습니다. 내일은 우리들 세상입니다!

태양이여, 아침 꽃들처럼 붉게 피어나는 마음들 위로 솟아라. 어제는 횃불이었다가 오늘은 재로 변한 거만한 잔치 상 위에도 솟아라.”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인가

아니면 희생당한 사람들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실제로 이미 나와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희생당한 사람이면서도, 늘 잘못을 저지른 자로 취급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죄책감을 지속시키는 마지막 형태는 하느님을 계속해서 벌을 내리는 하느님, 끊임없이 희생제물을 요구하는 하느님으로 여기는 짓이다.

그 죄책감은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덕성으로 강요되는 도덕규범들 안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 규범들은 보통 그들로 하여금 반발하거나 권리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의 큰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작은 잘못은 사정없이 처벌하는 데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흔히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의 상습적인 폭력은 눈여겨보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저항은, 자기네 권리를 지키거나 되찾기 위한 것일지라도, 무조건 단죄하려드는 데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그들의 투쟁도 이해심과 양순함이라는 덕성의 이름으로 저지되기 일쑤다. 선량함을 정의 앞에 또는 위에 놓는다. 그렇지만 그런 양순함과 선량함은 정의 실천을 피하고 양심을 잠재우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도덕규범들은 흔히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반발과 저항을 막으려고 만들어놓은 단순한 통제장치일 따름이다. 정말 정의로운 윤리의 기본 기준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골고루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온갖 규범은 의심해 마땅하다.


누가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재판관, 증인, 변호인인가?

인과응보 교리라는 종교 이념에 아직 사로잡혀 있는 욥은 자기 슬픈 운명을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조작해낸 신(神)에게 돌릴 도리밖에 없다.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가운데 누군가 나서서 자기와 하느님 사이를 판가름하거나 중재해주기를 고대한다.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아는 욥은 누군가 자기 증인과 변호인이 되어주기를 애타게 바란다. 죽음의 문턱에 서서 누군가 자기 구원자와 복수자가 되어주기를, 적어도 자기 명예를 되찾아주기를 소원한다.

이 요구는 인류 4분의 3이 내놓고 있는 요구다. 자기들을 짓밟고 있는 조작된 신(神)에게 맞서는 재판관, 증인, 변호인, 명예를 되찾아 줄 분이 있어야겠다는 요구다. 그러나 욥은 그런 사람을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오로지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그와 연대하신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인류 4분의 3에게도 그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는가? 재판관들, 증인들, 변호사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성경에서, 정의는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인권과 권리를 옹호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회 모순과 불평등을 잊고 세계가 평등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한 - 이는 이념에 눈이 멀어 있는 상태다. -, 불의한 사회와 세계가 그대로 지속되고 만다.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와 세계 속에서 정의롭게 산다 함은 불의한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정의로운 관계로 바꾸어놓는 일에 몸 바침을 뜻한다. 굶어죽게 된 사람이 먹을 것을 훔치는 경우를 부유한 사람이 재산을 더 쌓기 위하여 어떤 모양으로든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공동 재산을 훔치는 경우와 똑같이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 가난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부유한 사람은 아무 탈 없이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신학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중개 천사가 될 수 있는가?

엘리후는 하느님과 욥 사이에 중개 천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욥이 깨달음을 얻어 구원을 받으려면 그런 중개자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로써, 재판관-증인-변호인-복수자라는 주제가 약간 변한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그 중개자가 욥과 고통 받는 무죄한 모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는 죄 없이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는 중개 천사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욥에게 한사코 죄책감을 심어주려 애쓴 세 친구나 왜 고통을 당하는지를 곱씹어보고 한사코 배우려 애쓰라고 권하는 엘리후처럼 행동하지 않는 신학자는 그런 중개 천사가 될 수 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왜 자기네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하여 안다는 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아직도 더 얌전하게 복종만 하고 있어야 할까?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신학자가 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자기들과 연대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다. 자기들을 짓누르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고 자기들을 없애려 덤비는 악한 세력에 맞서는 투쟁에서 자기들과 동맹을 맺어주시는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신학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거짓된 신관(神觀)들 - 하느님에 대한 심상(心想)들 -, 자기들을 짓이기는 조작된 거짓 신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비판할 수 있다. 정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는 일에 몸 바치면서 얻은 자기네 하느님 체험을 경제․정치․사회․문화와 연결시켜 자연 및 사회와 맺는 관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그들이 형제애를 실천하면 권력집중을 막아낼 수 있고, 그들이 나눔을 실천하면 재산을 쌓으려는 정신을 막아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론으로 신학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제일 먼저 요구되는 사항은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그들과 연대하는 일이다. 그들의 기쁨과 슬픔, 걱정과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신학 체계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 체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결론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종교 실천을 꾸려낼 수 있으며, 그들의 하느님 체험을 존중할 수 있다. 신학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하느님을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평가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다. 낡은 신학 체계를 따르는 편이 쉽게 보일지 모르지만, 더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낡은 신학 체계는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자기네 이익에 맞추어 짜놓은 체계이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말하듯이,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을 수 없다.

신학자의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임무는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과 연대하시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과 연대하는 일이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과 맺는 그 같은 연대는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하느님께 뒤집어씌운 온갖 불명예스런 심상(心想)을 하느님의 이름에서 지워내고 씻어낸다. 사실 인과응보 교리에 따른 종교관은 - 인정 없는 부유한 사람들과 불의한 권력자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감추어 주는 이념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교관은 - 하느님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 즉 하느님이 마치 불의를 부추기고 숨겨주는 분 인양,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는 분 인양, 희생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시는 분 인양 꾸며댄다. 그래서 하느님의 이름에서 온갖 오명을 떨어내고 씻어내는 일은 온전히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몫이다. 그 일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변호해야 하는 신학자의 몫이기도 하다. 올바른 신학자의 임무는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종교적 죄인임을 고백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큰 죄가 없음을 밝혀내는 데 있다. 시편 50과 51에 참회문이 나와 있다.

“악인에게는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내 계명들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네 입에 올리느냐?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뒤로 팽개치는 너이거늘. 너는 도둑을 보면 함께 뛰고 간음하는 자들과 한패가 된다. 너는 입을 놀려 악행을 저지르고 네 입술은 간계를 엮는다.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거슬러 말하고 네 어머니의 아들에게 모욕을 준다.  네가 이런 짓들을 해 왔어도 잠잠히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로 여기는구나. 나 너를 벌하리라. 네 눈앞에 네 행실을 펼쳐 놓으리라.”(시편 50,16-21)

“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시편 51,5-6)


참된 종교의 도전

욥기는 비극으로 넘친다. 처음부터 끝까지 욥은 자기와 함께 연대해 줄 사람을 찾지만, 하느님 밖에는 아무도 그와 연대해 주지 않는다. 이는 인류 4분의 3의 처지다. 인류의 4분의 1이 외면한 가운데 하느님만이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을 편드신다. 인류의 4분의 3이 거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면, 이는 다름 아닌 하느님 자신이 당신의 것을 빼앗기신 셈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골고루 나누어 쓰면서 친하게 지내라고 당신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류의 4분의 3은 그런 하느님과 손잡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정의 실현을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 문제는 심각하다. 만일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과 동맹을 맺고 계신다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을 통과하는 길뿐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에게 이르는 길은 그들과 연대하는 길뿐이다.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자기가 길에서 반쯤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날지 어떨지, 그 사람을 만나 자기가 무슨 행동을 할지 미리 알지 못했다. 초죽음이 된 사람을 발견하고 그 사람의 필요에 순종한 다음에야 자기가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았다.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우리도 가난한 사람들이나 힘없는 사람들과 한 마음 한 몸이 되고 그들과 적극 연대함으로써 하느님과 다시 맺어지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말해서, 종교를 어떻게 생활화해야 할지를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길은 위로 향해야지 아래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거만을 떨며 비웃을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방향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편다.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타고르는 “나의 하느님,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은 당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들은 당신 밖에 갖지 못한 사람들을 비웃습니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은 하느님 밖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하느님도 당신께 속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밖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시다. 그들과 연대하고 동맹을 맺어주는 자는 하느님 밖에 아무도 없다. 누가 있어 그들의 울부짖는 질문과 도전에 답변을 해 줄 수 있을까? 가난한 사람들 및 힘없는 사람들과 하나가 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답변을 해 주려 시도해왔다. 백 년 전에 타고르는 고통 받는 백성과 함께 하는 자기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열린 초대를 했다.

“주님이시여. 피 묻은 발로 싱그러운 녹색 땅을 밟고 가난한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거만하게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저들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몫은 버거운 권력 아래서 고통 받고 신음하면서 여태껏 얼굴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울음을 삼키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일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 고통스런 떨림마다 깊은 밤 당신께 울렸습니다. 우리가 받은 모욕마다 당신 큰 침묵이 받아들였습니다. 내일은 우리들 세상입니다.

태양이여, 아침 꽃들처럼 붉게 피어나는 마음들 위로 솟아라. 어제는 횃불이었다가 오늘은 재로 변한 거만한 잔치 상 위에도 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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