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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끝까지 남는 것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3 조회수962 추천수11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3 주일 - 끝까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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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큰 사고를 한 번 낸 적이 있는데 춘천 갔다 오다가 신호등을 못 보고 자가용을 친 일입니다. 제가 몰던 차가 군용트럭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앞에 있던 프라이드 승용차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간신히 핸들을 틀고 그 사람도 멈추어 서서 왼쪽 앞바퀴 쪽을 쳤습니다. 30센티만 운전자 쪽으로 쳤더라면 운전자는 최소 불구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차는 폐차시켜야 했지만 사람은 크게 다치지 않아 합의를 하여 잘 해결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상병 말 호봉쯤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지낸 날보다 제대할 날이 적게 남아있던 때였습니다. 대학도 복학해야 하고 취업 준비도 생각해야 했기에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던 때였습니다. 잠꼬대도 영어로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면서 ‘만약 이 사고로 감옥생활을 해야 하고 그래서 취직도 안 되고 그렇게 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영어공부니 대학공부니 하는 것들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이 될 뻔 했구나!’

아마 그 때부터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들이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인가, 아니면 결국 아무 부질없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것들인가?’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은 지붕까지 금으로 치장되어 멀리서도 반짝거리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성전을 보고 감탄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 성전이 완전 허물어져서 쓰레기더미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40년 뒤에 그 웅장하던 성전은 잿더미가 되었고 지금은 그 위에 이슬람 사원이 서 있습니다. 그 웅장한 성전을 고생하여 세웠지만 짧은 시간 영화를 자랑하다 결국 다 허물어지고 만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사실 성전이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들은 돌로 만든 성전은 숭배하면서도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아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그들은 헛된 꿈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헛되고 헛된 삶이 되어버렸고 나라까지 잃고 남의 나라에서 흩어져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결국 쓸모없게 되어버릴 것들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각자가 희망하며 추구하는 성전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권력일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일 것이고 연예인은 인기일 것이고 학생은 점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세상 마지막 순간에 가치 있는 것들로 남게 될까요? 하느님 앞에서 대통령이었다고 최고 부자였다고 1등만 하였다고 한다면 하느님께서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까요? 혹시 우리가 추구하는 이런 것들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다 누리었던 솔로몬이 쓴 이 글과 같은 것은 아닐까요?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태양 아래에서 애쓰는 모든 노고가 사람에게 무슨 보람이 있으랴?” (코헬 1, 1-3)

 

만약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면 헛되지 않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래서 제자들은 세상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지를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징조가 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그 이전에 박해가 먼저 올 것이라고 하시고 바로 그 순간이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하십니다. 언제 마지막 순간이 오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마지막 순간은 오고 세상이 끝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죽음은 도둑처럼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전에 당신을 증언할 기회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헝가리 공주로서 엘리사벳이라는 성녀가 있습니다. 그분은 왕족으로서 독일의 한 성주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자녀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전쟁에 나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그분은 자신의 성 옆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고, 손수 하루에 두 번씩 상태가 심한 사람들 위주로 치료를 도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성안에 있는 재물이며 옷가지들을 팔았습니다. 물론 시댁의 반대도 거세었지만 팔 수 있는 것들은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녀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죽기 직전에 자신이 입고 있는 싸구려 옷을 제외하고는 모두 팔아서 진짜 주인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이고 각자 나름대로 가치 있다는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의 권력도 쓰레기이고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돈도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분을 위해서 한 행동만이 그분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한 행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분을 증거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박해가 올 텐데 그 때가 당신을 증거할 순간이라고 하시며 그것을 더 중요시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면 박해를 받게 마련이고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면 그것만이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한 가치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연인들 사이에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남자는 프로포즈를 하기 위해 하루 종일 꽃길을 만드는가 하면 애인의 집 문 앞에 자신이 손수 만든 예쁜 하트와 편지를 갖다 놓아 감동을 줍니다. 애인이 기억하는 것은 상대가 자신을 위해 노력한 것들입니다. 굳이 집에서 밥을 잘 먹고 텔레비전을 본다던가 회사에 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해 준 것을 기억하고 감동받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가치 있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한 일이지 우리 자신을 위해 한 것들은 그분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떤 자매님이 간단한 접촉사고 난 사연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커다란 트럭 옆에 서 있다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회전하는 트럭에 부딪혀 차 앞이 조금 부서진 상황이었습니다. 경찰은 쌍방으로 하라고 했지만 운전사는 견적의 반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견적은 60만 원 정도 나왔는데 함께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트럭 운전사 아저씨의 주위에도 천주교 신자가 많은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천주교 신자였는데 자신을 너무 낮추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 자신은 성당에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그 자매님은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성당을 다녀보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고 그렇게 그 돈을 한 사람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희생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그 형제님도 언젠가는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돈도 통장으로 넣어주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희생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고 난 상황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었고 그렇게 그 자매는 기회를 이용한 것입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고 편안하다면 그리스도를 증언할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 자매가 한 행위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 일 자체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예쁜 일이고 하느님은 그 일을 절대 잊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그런 것이 가치 있는 것이고 그 기억은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내가 땀 흘려 노력한다고 다 하느님 앞에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성당에서 교리교사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봉사도 있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봉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기준은 바로 “하느님을 위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일을 합니다. 나를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사람은 당연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하면서 박해를 받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심판 때에 주님 앞에서 내어놓을 수 있는 보화를 쌓아가며 살아갑시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마련해 줍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2코린 4, 17-18)

 

 

 

 

 
<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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