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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리를 눈 뜸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5 조회수423 추천수8 반대(0) 신고
 
 
 
 

진리를 눈 뜸 - 윤경재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 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루카 18,35-43)

 

 

얼마 전 렉치오 디비나를 통한 성경 묵상 시간에 이 대목을 다루었습니다. 그때 재미있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대목이 자주 나오는데 요즘에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형제의 심중에는 예수님을 대리하는 성직자나 교회가 그 기적을 대신 일으켜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을 담은 질문이었습니다. 참 깊은 묵상에서 나온 좋은 질문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모두 이 질문이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역시 다양한 질병과 장애, 갖은 환란 속에서 살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예수님 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도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하여 새롭게 어려움으로 다가온 것도 생겼습니다. 인간의 평균수명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경제력도 훨씬 나아졌습니다. 그럼에도, 질병과 환란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 수의 비율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거라 짐작합니다. 

묵상시간에 우리는 먼저 그런 비율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자연 재해와 질병이 왜 생기는지 등 인간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여러 이유는 신비로 접어두고 우리가 수긍할 수 있는 이유 중에서 제일 공감이 가는 것으로 인간이 너무 타인과 비교하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해지려 하기 때문에 결국 뒤쳐지는 사람도 생겨나고, 넉넉함에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묵상 시간에 남과 비교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나눔과 절제와 희생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몫이라는 데 일치를 얻었습니다.

지금 인간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으냐는 부정적 시각도 있었습니다. 또, 그래도 많은 사람이 여러 분야에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지구의 재앙을 조금이나마 걱정하고 준비하는 모임이라든가, UN이라든지 G20 같은 모임을 만들어 파국을 피해보자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낙관적 시각도 나왔습니다. 

노예 문제를 예로 들면 사도 바오로도 노예문제에 관해서는 달리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필레몬에게 노예 오네시모스를 벌주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이기만을 부탁했습니다. 노예해방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바오로의 본심은 그 정도가 아니었겠지요. 인류사에서 가장 비 인간적인 노예문제가 해결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1863년에 선언하고서야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정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이러저러한 묵상과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대한 출발로 시작한 인간애의 물줄기가 여전히 도도히 흐르고 있다는 결론으로 묵상시간을 마쳤습니다. 나의 작은 각성이 하나둘 모일 때 예수님을 지향하는 교회 공동체는 힘을 얻을 것이고 비록 내가 살아서 목격할 수는 없을 지라도 더욱 밝은 종말의 시간이 반드시 온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바로 우리입니다. 현세에서 눈먼 자로서 불편함과 부족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예리코 소경의 이름이 티매오(존경과 명예)의 아들인 것은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존경과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고 불행과 죄의 아들이 아니냐는 비웃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만남을 통해 존경과 명예를 가져올 수 있다는 뜻 아닐까요?

불행의 아들처럼 보였던 티매오의 아들이 사랑받는 자라는 뜻인 다윗의 자손에게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분의 정체성을 누구보다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비를 입자 하느님께 찬양을 올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주제가 예리코의 소경을 통해 하나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예화는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예리코의 소경처럼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 확신하고 다가가고 따른다면 진리를 한눈에 깨달을 수 있는 눈 뜸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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