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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민족해방과 인류해방의 길>
작성자장종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7 조회수314 추천수2 반대(0) 신고
 

<민족해방과 인류해방의 길>


우리 민족과 인류가 신자유주위와 자본주의라는

악령에서 벗어나는 근본 처방을 호세아서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 해설 일부를 소개해본다.

생소하고 생경해도 주의깊이 묵상해볼만 하지 않을까?


제1막

1,2-9 역사 속의 인물들과 그 역할

기자: 먼저 호세아더러 자기 집단을 우리에게 소개해 보도록 하자.

호세아: 여기에 내 아내 고메르(1,2-3), 그녀의 남녀 동료, 몇몇 결혼한 여자(4,14), 이미 가정의 어머니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농촌에서 일하는 나의 동료들도 있다. 우리 가운데는 젊은이, 늙은이, 내 자녀인 ‘이즈르엘’(1,4), ‘로 루하마’(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로 암미’(너희는 이미 내 백성이 아니다.)와 같은 아이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집안’을 형성하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다. 집안에는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고아들, 과부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다(14,4). 우리가 겪고 있는 체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상황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 그 거울에 비치는 상(像)들은 우리에게 세 막으로 된 비극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서막(1,2-9)과 마지막 막(2,23-3,4)은 두 갈고리와 같다. 그 두 갈고리에 그물이 달려 있다. 이 그물이 이 비극의 본론에 해당하는 막(2,24)을 가리킨다. 이 그물은 비어 있지 않다.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우리 꿈에 필요한 벽돌들이 들어 있다.

기자: 호세아는 먼저 자기 아내 고메르를 소개했다. 이 이야기에서 고메르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의 말을 들어보자.

고메르: 나는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다(1,3). 모든 이스라엘 시골 처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집안’의 구성원으로서 그 모든 활동에 참여했다. 해마다 심은 것을 거두어들이고, 경신례를 바치고, 축제를 지내고, 춤을 추고, 전통적인 민간종교의 전통 예절을 지켰다(4,11-14). 그러다가 호세아를 알고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결혼을 했다(1,2-3). 그리고 자녀 셋을 낳았다(1,3.6.8-9).

기자: 호세아, 당신의 결혼생활을 설명해 보라. 당신 생애에서 그 결혼생활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고 싶다.

호세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나의 결혼생활은 무척 강렬한 도전으로서, 하느님을 체험하게 해 주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어떤 관계를 맺고 계시는지를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내 ‘집안에 속한 처녀’ 고메르와 결혼을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디블라임이었다(1,3).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의 창녀 짓이 우리 집안을 망쳐놓았다! 나라의 탈선이 모든 집안을 물들여 놓았다. “호세아를 통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시작.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1,2) 많은 부모와 남편이 자기네 딸과 젊은 아내가 사제들과 나라의 관리들이 부추기고 강요하는 바람에 탈곡마당에서 창녀 짓을 하는 꼴을 목격해야 했다(4,11-13). 그것은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나는 내 마음이 피를 흘리는 것을 느꼈다.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가 그러했다(4,2). 그런 일상적인 비극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체험하게 해 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집안의 하느님’을 발견했다. 백성이 겪는 고통을 두 눈 부릅뜨고 내려다보고 그들을 구원하는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발견했다. 우리는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런 현상과 사건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각 사건은 역사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아내 이스라엘 백성이 창녀 짓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남자, 여자, 젊은이 할 것 없이 아시리아 제국과 특권지배층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강제노역과 군대에 끌려갔다. 여자들은 집안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세금을 바치기 위하여 농촌에서 일을 하고 그 소출을 관리해야 했다. 그 외에도, 그들은 국가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이용당해야 했다. 그런 식으로, 집안이 무너져 내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꿈이 담긴 그물이 매달려 있는 두 갈고리 가운데 하나인 비극의 서막을 설명하고 있다. “호세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시작.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메르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었다.”(1,2-3)

기자: 우리는 이미 호세아와 고메르의 자녀 이름을 들었다. 이제 그 아이들에 대한 말을 들어보자. 아이들 이름을 그렇게 이상하게 지은 이유를 설명해 달라.

고메르: 이스라엘의 심각한 경제․정치․사회․종교 위기는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삶을 규정하는 바이러스와 같았다. 생명을 낳는 과정이, 희망을 가득 안겨주어야 할 그 과정이 모든 여자에게 고뇌거리가 되었다. 나라의 앞날에 대한 그 같은 고민이 우리 자녀에게 그렇듯 이상한 이름을 짓게 된 이유다.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이즈르엘이라고 하여라. 머지않아 나는 이즈르엘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어 예후 집안을 벌하고 이스라엘 집안의 왕조를 없애 버리리라. 또 그날에 이스라엘의 활을 이즈르엘 평야에서 꺾어 버리리라.’”(1,4-5)

호세아: ‘이즈르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예후 가문에 내릴 벌을 선포하고자 했다. 예후는 고삐 풀린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많은 피를 흘리고, 주님을 바알 수준으로 낮추고, 백성을 소외시키고, 군대와 공식 종교라는 두 세력을 앞세워 나라를 망가뜨렸다. 깊이 따져볼 때, 이즈르엘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창녀 짓을 강요하는 나라의 구조를 고발하고 있다. 그 고발은 온 몸에 불의한 체제의 굴레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곧 백성이 살아나는 것과 같다.

기자: 그런 상황에 당신들은 어떻게 반발하고 저항했는가?

고메르: 이스라엘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려고 우리는 또 다른 아기를 무대에 세웠다. “고메르가 다시 임신하여 딸을 낳자,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로 루하마라고 하여라. 나는 더 이상 이스라엘 집안을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으리라.’”(1,6)

‘로 루하마’라는 이름은 어미의 태중에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뜻한다. ‘깊이 사무친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름’은 ‘태중’, ‘내장’과 똑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계상황에 대한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 상황은 우리가 생명을 낳아 주시는 하느님의 품속에서 쫓겨났음을 가리키고 있었다(창세 49,25).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지도자들이 탈선하고 우리 자신이 잘못한 결과다. 국가는 백성을 먹여 살리는 대신 백성을 벗겨먹고 있었다. 얼마나 큰 모순인가! 그 모순을 분명히 보여주려고, 나는 이스라엘 어머니들의 습관에 따라서 오래 동안 내 딸에게 젖을 먹였다(창세 21,8; 2마카 8,27). 생명을 유지하려면, 먹을 것을 충분히 먹어야 한다!

기자: 당신들은 또 다른 인물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그 아기의 이름은 ‘로 암미’다. 이 셋째 아들을 소개하는 이유를 설명해 보라.

호세아: 먼저 성경 본문을 보자. “고메르가 로 루하마에게 젖을 뗀 다음에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로 암미라고 하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지 않다.’”(1,8-9)

심각한 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사실상 깨졌음을 보여 주었다. 우선 ‘로 암미’(“너희는 이미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이름을 설명하려고 한다. 나라의 특권층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미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밖에 말씀하실 수 없다. 그 표현은 아주 모진 표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 가운데 계시면서 보호해 주고 구원해 주시는 계약의 주 하느님의 이름을 모른 체 했다. 그런 상황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럴 때 무엇 때문에 아이들을 낳는가. 그 아이들은 무엇을 위하여 태어나는가?(호세 13,12-13)

기자: 고메르, 당신은 무슨 근거로 나라를 그렇듯 강하게 비판하는가?

고메르: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나라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농촌에 살아가면서 겪고 있는 구체적인 체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시리아 제국에 경제․정치적으로 매여 있는 나라의 체제와 구조가 우리를 약탈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집안’에서 살아가는 생활은 무너지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이집트 해방으로부터 세우기 시작한 평등사회에 대한 꿈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고 있다.

기자: 호세아, 고메르의 설명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는가?

호세아: 그렇다. 그런 도전적인 상황이 우리의 연대를 다지게 하고 우리에게 창조력을 되살려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를 평가하고,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 농민 집단은 둘째 막을 올리려고 한다. 이 막이 우리 비극의 핵심이다. 집을 다시 세우고 집안을 다시 일으킬 벽돌들이 담긴 그물을 소개하려 한다.


제2막

1,10-2,22 잘못된 상황에 대한 심판, 부족동맹 계획의 회복

기자: 호세아, 말 잘 들었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 달라.

호세아: 나라가 온통 창녀 짓을 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심판을 내리는 장면을 살펴보자. 우리가 보고 있는 심판 장면과 사용하는 언어는 중동 법정에서 전형적인 형태다. 주님께서는 심판관이자 남편이셨다. 주님께서는 아내로서 충실한 이스라엘 백성의 남편이자 부모가 되기도 하신다. 그리고 애인들은 우상들, 이방인 나라들 특히 아시리아, 이스라엘 왕국의 제도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자녀들은 고발의 증인이다. 무대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주님께서 창녀 짓을 한 아내를 불러 세우고, 앙갚음을 다짐하신다. “그러지 않으면 태어나던 날처럼 그 여자를 발가벗겨 밖에 내세우리라. 그 여자를 광야처럼 만들고 메마른 땅처럼 되게 하여 목이 타 죽게 하리라.”(2,5) 이는 남편이 충실치 못한 아내를 버리는 방법이었다(참조. 민수 3,5; 에제 16,36-43; 23,25-30). 주님께서는 재판정에 출석한 피고들에게 논고를 들이대신다(호세 2,10-11). 그러나 결국 주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불충실보다 더 강하다(참조. 아가 8,6). 주님께서는 당신 아내인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도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신다. 그래서 또 다른 길을 취하기로 작정하신다. 즉 광야 시절처럼, 불충실한 아내를 붙잡아다가 다시 사랑을 하신다.


첫 번째 장면: 고발과 단죄

기자: 호세아, 당신의 상황분석에서 핵심을 느낄 수가 있을 것 같다. 그 성찰을 사람들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게끔 차분히 다시 설명해 달라.

호세아: 먼저, 남편이자 재판관이기도 한 하느님이 충실치 못한 나라를 고발한 데 대한 증인으로 우리 자녀들을 부르신다. 왜냐하면 나라가 탈선한 데 따른 첫 번째 희생자들이 그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를 고발하여라. 너희 어미는 내 아내가 아니고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다. 그 얼굴에서 불륜을, 그 젖가슴 사이에서 간음을 치워 버리라고 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태어나던 날처럼 그 여자를 발가벗겨 밖에 내세우리라. 그 여자를 광야처럼 만들고 메마른 땅처럼 되게 하여 목이 타 죽게 하리라. 나는 그 자식들도 가엾이 여기지 않으리니 창녀의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미가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을 배었던 그 여자가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 “‘양식과 물 양털과 아마 기름과 술을 주는 내 애인들을 쫓아가야지.’ 하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시나무로 그 여자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라.”(2,4-8)

그 고발은 백성, 남자들과 여자들을 소집하여 그들이 당하고 있는 소외를 깨닫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나라가 모든 것을 거덜냈다. 생산물을 거두어가고, 임금을 착취하고, 자녀를 빼앗아갔다. 그런데도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몸까지 유린한 나라를 사람들은 큰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라가 빵과 물과 기름과 술을 주는 줄로 알았다. 주님께서 진심으로 수없이 호소를 하자, 백성은 자기네 잘못을 깨닫고 첫 남편인 주님께로 돌아오기로 결심한다. “그 여자가 애인들을 쫓아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들을 찾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그제야 그 여자는 말하리라. ‘이제 가야지. 첫 남편에게 되돌아가야지. 그 때가 지금보다 더 좋았는데…….’ 그 여자는 내가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을 주고 바알을 위하여 그들이 쓴 금과 은을 불려 주었음을 알지 못한다.”(2,9-10)

기자: 고메르, 호세아가 한 말을 더 깊이 설명해 달라.

고메르: 아들이 태어나면, 남편은 흔히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을 보게 해 주었구나.”라고 말한다(호세 1,3ㄴ). 한편 땅의 소출은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선물이다(2,10). 백성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돌아와야 한다(참조. 이사 62). 우리는 농민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고 싶다. 백성은 주님께서 바알과 같은 분이신 줄로 여기고, 바알을 주님인 양 섬기는 나라가 생산과 출산의 주인인 줄로 착각한다. 우리 큰 소망은 백성이 생각을 철저하게 바꾸도록 하는 데 있다.


두 번째 장면: 회개

기자: 점점 흥미로워진다. 호세아, 방금 고메르가 말한 대로,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네 입장을 정확하게 세우도록 하기 위한 대책이 있는가?

호세아: 백성의 회개는 허약하기 짝이 없음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참조. 호세 6,4). ‘집안’을 되살리는 회개를 일으키려면, 삶의 뿌리에서 출발하는 강력한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집안’은 ‘분열시켜 통치하라.’는 이념에 따라서 국가가 부추기는 창녀 짓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남자가 여자를 대적하고 여자가 남자를 대적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가던 길을 돌이킬 필요가 있다.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부족동맹 계획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거기에서 나는 그 여자에게 포도밭을 돌려주고 ‘아코르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리라.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2.16-17)

‘아코르 골짜기’는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그 장소에서 백성이 주님께 불충을 저질러 벌을 받았다고 말한다(참조. 여호 7,24-26). 그 명칭은 ‘불행한 골짜기’를 뜻했다. 그리고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준다는 말은 약속된 땅으로 들어선다는 것을 뜻했다. 우리 선조들은 부족동맹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문을 통과했다. 그 심상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즉 집안 안에서 올바른 인관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새로운 태도를 보여주려 한다. 이제, 남편이 아내를 다시 끌어들이려 한다. 첫 사랑을 고백하던 광야로 데려간다. 거기에서 심혈을 기울여 자기 마음을 열어 보인다. 그리하여 광야가 포도밭으로 변한다. 불행한 역사가 희망찬 길로 변한다. 남편이 사랑의 힘으로 사회의 장벽을 허물어뜨린다. 아내를 불러 응답을 기다리며 변화의 기적을 보고자 한다. 세 번째 무대에서는 그 과정을 제시할 것이다.


세 번째 장면: 부족동맹의 계획을 다시 취한다

기자: 호세아, 세 번째 장면을 소개해 달라.

호세아: 우리가 겪은 고통스런 체험은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 새로운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 실천의 첫 번째 측면은 ‘바알을 벗어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즉 백성을 소외시켜 벗겨먹는 군주제의 기둥을 부러뜨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나는 그 여자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치워 버리리니 그 이름이 다시는 불리지 않으리라.”(2,18-19)

‘바알’은 히브리어 이름으로서 ‘주인’, ‘소유자’, ‘남편’을 뜻한다. 바알은 또한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알 숭배는 주님을 거짓 신들과 혼동하게 만든다. 주님을 다른 많은 우상들 가운데 하나로 보게 한다. 그런데 성경 문화에서 남편이신 주님께서는 다른 많은 남편들 가운데 한 명이 아니시다. 유일한 남편이시다. 주님을 ‘내 남편’이라 부를 때, - ‘남편’만을 뜻하는 히브리어 낱말 ‘이쉬’라고 부를 때, - 혼동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의 아내인 백성이 첫 사랑을 다시 받아들이고 그분을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기자: 고메르, 호세아가 한 말에 덧붙일 말이라도 있는가?

고메르: 그렇다. 이 장면의 핵심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 장면에서 남편은 자연과 계약을 맺고, 군주제의 또 다른 기둥인 군대를 없애겠다고 약속하고, 전쟁을 뿌리 뽑겠다고 맹세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내와 다시 결혼하리라 결심한다! 여기에 집안을 다시 세울 초석이 놓인다. 다음 본문을 눈 여겨 살펴 보라. “그날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계약을 맺고 활과 칼과 전쟁을 이 땅에서 없애 버려 그들이 편안이 자리에 누울 수 있게 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2,20-22)

호세아: 집안에서 세워지는 새로운 관계는 부족동맹 사회, 즉 정의와 인권이 존중되고 규범이 되는 사회를 상기시킨다. 사랑과 부드러움은 우리에게 연대와 자비와 우정을 상기시킨다. 이 모든 것은 애정의 표현이다. 결국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라는 계획에 안정성을 주는 것은 충실함이다. 그런 분위기가 자녀를 낳고 기르는 데 알맞다. ‘집안’은 미래가 있다!

기자: 호세아, 그렇다면 당신은 집안에 대하여 어떠한 미래를 꿈꾸는가?

호세아: 가정, 집안을 회복하려는 우리의 이상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제3막을 열어야 할 것 같다.

고메르: 제3막은 집을 다시 세울 벽돌들이 담긴 그물이 매달려 있는 또 다른 걸고리다. 다시 세워지는 집은 나라가 무너뜨린 과거의 집과 같지 않다. 우리에게, 부족동맹 계획의 해방 실천을 다시 취한다는 것은 과거와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순간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막에서 살펴본 대로, 생명을 낳는 똑같은 원리를 다시 취할 것이다.


제3막

2,23-3,4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

기자: 고메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계획을 알아들을 수 있게 도와 달라.

고메르: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과 나라의 강요에 의하여 집안이 흩어지고 무너진 체험을 단계적으로 비교해 보자. 먼저 아기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 일로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하여, 주님과 맺은 계약에 응답하는 해방실천의 본질부터 살펴보자. “그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리라. 땅은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에 응답하고 그것들은 이즈르엘에 응답하리라. 나는 그를 이 땅에 심고 로 루하마를 가엾이 여기리라. 또 내가 로 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그는 ‘저의 하느님!’ 하고 말하리라.”(2,23-25)

아내가 다시 남편에게 돌아오는 순간, 자연이 다시 풍요로워질 것이다. “하느님이 심으신다.”라는 뜻을 가진 이즈르엘은 간청의 상징이 된다. 주님께서는 비를 내려 땅을 풍요롭게 하시고, 땅은 음식, 즉 곡식, 포도주, 기름을 내어 응답하신다. 주님과 이스라엘, 남편과 아내가 오랜 별거생활 끝에 다시 만난다. “내가 로 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그는 ‘저의 하느님!’ 하고 말하리라.”

기자: 호세아, 고메르가 한 말에 덧붙일 말이라도 있는가?

호세아: 둘째 단계에서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3,1)

이 비교를 알아듣겠는가?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자기네 가치를 잃어버렸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왕과 그 고관들은 백성의 생명을 담보로 자기네 야욕을 채우려고 이방인 제국들이 지우는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따라서 백성을 살려내고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군주제와 그 우상을 떨쳐버려야만 가능하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이처럼 오랫동안 임금도 대신도 없이, 희생 제물도 기념 기둥도 없이, 에폿도 집안 수호신도 없이 살 것이다.”(3,4)

기자: 고메르, 결혼이라는 심상을 그렇듯 강조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고메르: 우리가 그 심상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사람들 대부분이 결혼생활을 하고, 우리의 경우,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집안을 다시 정비하는 일이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이 공으로 거저 주시는 사랑임을 알아듣도록 돕고자 한다. 백성의 많은 배신에도, 아버지-어머니인 하느님, 집안을 다시 세워줄 분이 다시금 계약을 맺어주려 하신다. “나는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지내야 하오. 창녀 짓을 해서도 안 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되오. 나도 당신에게 그렇게 하겠소.’”(3,3)

우리가 보기에는, 왕과 사제와 군대와 국가가 없는 부족동맹 사회의 해방실천을 다시 취해야만, 모든 사람이 자유로이 골고루 행복하게 사는 이상적인 평등사회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 대가족 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가 생활하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 상태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만난 장소인 광야에서 시작된 마지막 행복이다(2,16; 9,10; 13,5).

기자: 고메르, 지금까지 말한 역사를 종합해 보라.

고메르: 우리는 여러 일화를 통하여 사랑의 역사, 즉 사랑의 ‘출발’, ‘헤어짐’,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다시 만남’을 이야기했다. 자기를 고집스럽게 배신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남편으로 본 주님을 제시했다. 하느님은 당신 아내 격인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인도하려고 무진 애를 쓰신다. 그분의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이 쳐놓은 온갖 장벽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인간다운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여주려 했다. 아버지-어머니이신 하느님은 당신 자녀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면서도 사랑과 온정을 가지고 행동하신다. 그 교정은 백성을 자기네 하느님께로 다시 인도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만이 당신 백성에게 참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참조. 요한 10,10).

기자: 고메르와 호세아, 지금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 데 대하여 감사드린다. 호세아,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 달라.

호세아: 우리는 우리 이야기가 백성의 삶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우리가 겪은 체험은 모든 시대의 모든 백성에게도 적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온전한 집안’, ‘평등사회’를 다시 세우는 것은 백성에게 달려 있다. 특히 온갖 모양으로 따돌림 당하는 모든 사람,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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