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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의 명인(名人)" - 11.1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7 조회수468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1.17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묵시4,1-11 루카19,11-28

 

 

 

 

 

"삶의 명인(名人)"

 

 

 

어제 읽은 가야금의 명인 황 병기님의 인터뷰 내용 중

다음 대목이 신선했습니다.

기자가 국악 인생 60년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을 물었을 때

명인의 답변입니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습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얼마나 멋진 답인지요.

가야금의 명인일 뿐 아니라 ‘삶의 명인’이라 할 만합니다.

이어 논어에 대한 설명 중 다음 대목도 음미할 만합니다.

 

“다시 논어 이야기할게요. 재미있어요.

  논어 구절인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예 성어악)’은

 ‘시에서 감흥 받고, 예를 알아 인격을 갖추고, 음악으로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음악이 인간 완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순간

우리 수도승들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가 떠올랐습니다.

시삼백(詩三白)이면 사무사(思無邪)란 공자의 말씀처럼

끊임없이 시편을 노래할 때 저절로 마음의 순결입니다.

시편에서 감흥 받고 예모 있게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음악의 공동기도를 드릴 때 완성되는 수도승의 삶이자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어쩌면 논어의 공자님 말씀과

공동전례 기도의 핵심적 진리가 이리도 일치되는 지요.

하느님 찬미해서 좋고 내 인생도 완성이니 일거양득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이래서 대부분 노래로 바치는 공동전례 기도요,

이에 충실 할 때 우리의 삶도 완성되어 삶의 명인이 됩니다.

다음 논어 설명도 좋습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나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의문형으로 끝나는 구절이 있지요.

  때때로 익히지, 줄곧 열심히 하라는 게 아니에요.

  여유 있잖아요.

  그리고 단정 짓지 않은 채 의문형의 여운을 주니 좋지요.

  요즘 사람들은 나를 몰라준다고 고민하지

  내가 남을 몰라주는 건 걱정하지 않아요. 여유가 없어요.”

 

이래서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우리 수도가훈이 빛납니다.

일중독에 빠지지 않고 여유 있게 살게 하고자 전례기도입니다.

매일 하느님의 노래방인 이 성당에서

하느님을 노래하며 삶의 여유를 회복하는

거룩한 시간낭비의 레크리에이션 공동전례기도시간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요한묵시록의 내용도 상징하는바 심오합니다.

요한이 파토모스 섬에 유배되었을 때 주어진 계시로

분명 오아시스와 같은 천상체험입니다.

그대로 우리 성전에서의 공동전례 장면 같습니다.

제대가 상징하는바 옥좌라면

양 옆에서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수도승들은

스물 네 원로를 상징합니다.

아니 미사 공동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들

천사들과 함께 천상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천상 옥좌의 네 생물들처럼

우리 역시 미사 때 마다 ‘거룩하시다’를 힘차게 노래합니다.

옛 교부들은 네 생물을 4복음에 비유했습니다.

사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시작하는 마르꼬 복음,

제물로 사용되는 황소는 제사 이야기로 루카 복음,

사람은 인간의 족보로 시작하는 마태오 복음,

독수리는 세상 창조 이전을 다루는 요한복음과 관련시켰습니다.

우리 역시 네 복음서를 충분히 읽고 깨달아 살아갈 때

옥좌 곁의 네 생물들처럼

공동전례 때 마다 하느님 찬미에 올인(all-in)합니다.

 

오늘 비유 다음의 끝부분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었다.’

 

예수님의 전 삶의 목표지점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자리로 바로 천상옥좌와 직결되는 지점입니다.

우리의 목표 역시 천상예루살렘이요,

매일 성전에서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를 통해

천상예루살렘을 앞당겨 체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힘을 받아 영육을 충전해야 역동적 순례여정이요,

삶의 명인이 되어 가야금의 명인 황 병기님처럼

‘언제나 지금이 가장 좋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일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하고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일 역시 잘합니다.

삶과 기도는 하나입니다.

사는 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만큼 산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말 그대로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천상 예루살렘을 맛본 이는

복음의 착한 종처럼 자기가 받은 탤런트에 최선을 다합니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즉시 주인의 칭찬이 뒤따릅니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남긴 종도 결과의 양에 상관없이 칭찬을 들었지만,

한 미나 그대로를 가져온,

자기 안에 갇혀 살았던

소심하고 의심 많고 무기력했던 이는 단죄를 받습니다.

사실 단죄이기 보다는 스스로 자초한 화입니다.

남의 성과를 비교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내 받은 탤런트에, 내 맡은 소임에 충실하면 주님의 착한 종입니다.

주님은 업적의 양을 보시는 게 아니라 삶의 충실도를 보십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가 받은 탤런트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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