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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유이냐, 생존이냐, 됨이냐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0 조회수379 추천수7 반대(0) 신고

 

 

소유이냐, 생존이냐, 됨이냐 - 윤경재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루카 20,27-40)

 

 

오늘 복음의 본문에는 네 줄기 사고와 의식의 흐름이 담겨있습니다. 사두가이의 생각과 모세의 의지와 율법학자의 태도와 예수님 말씀입니다. 부활을 주제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의식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세에서 이미 하느님의 판결을 받아 행복과 불행이 정해졌다는 사고입니다. 하느님만이 영원한 생명이시며 주님이시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죽음만이 남아 있고, 부활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일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니 현세의 삶을 즐기라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소유가 초점입니다. 재물을 누가 얼마나 많이 소유했으며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인의 재물 소유권이 하느님께 은총을 허락받아 생겼다고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인도 재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두가이들이 형사취수혼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일곱 형제가 자식을 낳지 않고 죽었을 때 그들과 결혼했던 여인은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는 물음입니다. 실제로 발생할 것 같지도 않은 극단의 예를 들어 질문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천국에서 소유권 다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정말 그럴듯하고 교묘한 자기 논리적 사고입니다. 

모세가 율법으로 정한 형사취수혼의 문제는 신명기 25장 5-10절 ‘후손에 관한 규정’에서 나옵니다. 형이 후손을 남지 않고 죽었을 때 동생이 형수를 맞아들여 후손을 이어야 하는데, 만약 동생이 형수가 싫어 맞아들이지 않으면 먼저 장로들이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신 벗겨진 자의 집안’이라고 오명을 씌운다는 규정입니다. 

모세의 사고는 한 집안의 존속 문제에 초점이 있습니다. 대를 이어야 하느님을 섬기는 집안의 정신이 유지된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여인의 인권이나 존재 문제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종족의 생존과 번성이 먼저이고 한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최소한만으로 보장한다는 생각입니다. 유대 여인에게 아들은 남편과 같은 보호자 역할을 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를 보호하고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과부는 안전한 생존을 보장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대 공동체는 그런 여인들을 보호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형사취수혼 제도는 이런 필요에도 부합합니다. 또 모세는 남성의 선택권도 인정했습니다. 그가 오명을 받을 각오가 돼있다면 형수를 내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본문에 나온 율법학자들은 방관자의 자세를 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발을 담가 그런 삶을 살아가기는 거북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머릿속으로는 받아들였는데 몸으로 살아가기엔 자신들이 포기할 것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체면이라든지 자기네 공동체에서 손가락질 당하고 따돌림 당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평소에 쓰던 가면을 벗어버리기가 싫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높여주고 편하게 해주는 가면을 놓치기가 아까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차원을 달리합니다. 사두가이들의 고약한 질문에 할 말을 잊었던 율법학자들도 예상하지 못 한 답변이었습니다. 주위에서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 하며 귀 기울였던 사람들도 모두 말을 잊었습니다. 과연 현명하고 지혜 넘치는 답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인간의 지혜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되는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현세의 연장이 아니라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이 만드신 처음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탈출기 3,6절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가리켜 보이는 구절입니다. 첫 마디가 네 아버지들의 하느님이라는 선언이고 이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선언을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란 뜻으로 정확하게 인식시켜주셨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 앞에 죽은 자로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이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또한 살아있는 존재로 돼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알맞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살아있는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존재로 변화된 모습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바로 다볼 산 위서 벌어졌습니다. 세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그 자리에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계셨다고 증언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채 하느님 앞에 거처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머물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또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바라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기워 갚으신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 같은 사상가는 그의 책 “To have or To be”에서 소유와 존재의 차이를 설명하며 소유에 매달리지 말고 존재하는 삶을 살도록 권유합니다. 법정스님도 무소유의 삶을 설파하셨습니다. 정말 지혜가 넘치는 삶의 지표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새로이 눈을 떠야하겠습니다. 소유와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그 너머에 또 다른 지평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아들이 되는 삶으로 건너가야 하겠습니다. 그 길은 처음부터 없었던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본래 우리의 모습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선택하는 길을 살아 부활에서도 하느님 앞에 거처하는 삶을 말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 길은 인간의 철학이나 신념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리켜 보이신 신앙의 힘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라야 그리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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