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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왕과 중재자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1 조회수677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 왕 대축일 - 왕과 중재자

 

임금님을 사랑하는 한 시골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과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 해는 워낙 농사가 잘 되어 먹음직스런 사과들이 많이 열렸습니다. 그는 그 중에서 가장 빛깔 좋은 것 몇 개를 골라서 임금님께 드리려고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이들은 의복도 입지 않고 고작 사과 몇 개 드리려고 임금님을 만나려고 하느냐며 그를 야단쳤습니다.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나왔지만 궁궐을 출입하는 귀족들의 옷에는 비길 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가 실망하며 돌아서는데 마침 왕비가 밖에서 궁궐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왕비는 임금에게 굉장한 사랑을 받고 있었고, 동시에 백성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왕비는 마차에서 내려 슬픈 표정의 농부에게 이야기를 듣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며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서 궁궐로 들어갔습니다.

궁궐로 들어간 왕비는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금 쟁반에 사과를 담아 임금 앞에서 직접 깎아 주었습니다. 임금은 사랑스런 왕비가 깎아주는 사과를 맛보고 너무 맛있다며 고마워하였습니다.

왕비는 그 때서야 그 사과는 밖에서 기다리는 한 농부가 임금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당장 그 농부를 불러들이라고 하고 그에게 좋은 의복과 상을 주며 언제라도 수확한 것을 자신에게 직접 가져와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마치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스델이 그랬던 것처럼 중재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중재자는 자신 위에 있는 사람과 자신 밑에 있는 사람을 둘 다 사랑해야하고 둘 다에게 사랑받아야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때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참석한 이들에게 포도주를 주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중재, 즉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는 말로 혼인잔치는 새로운 포도주로 계속 이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중재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뜻은 그리스도께서 어머니의 청은 무엇이나 다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그분을 사랑하시고, 어머니는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무슨 청이든 다 하신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를 은총의 중재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에 마리아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오는 은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더 크게 보면 하느님 아버지와 교회를 중재하시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도 이 멀고도 먼 하느님과 교회를 중재하기 위해 우선은 아버지께 잘 보여야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그에게서 죄의 용서를 받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신 까닭에 그리스도의 온 사랑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온 사랑을 받아내기 위한 방법은 그 분께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순종하는 아내가 남편에겐 가장 사랑스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세상에서 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메시아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머리에는 여전히 가시관이지만 왕관이 씌어져 있고 십자가 위에는 ‘이스라엘의 왕 나자렛 예수’ 라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왕은 가장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세상의 왕 같아 보이지가 않고 가장 힘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함께 매달려 있는 죄인 하나도 예수님을 조롱하며 진짜 왕이라면 자신도 살리고 자기도 살려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죄인은 어떻게 그런 모습을 보며 예수님을 왕으로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예수님을 하느님나라 왕국의 왕으로 고백합니다. 그랬더니 숨 쉴 힘조차 없게 보였던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며 당신이 하느님나라의 왕이심을 인정하시고 당신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을 당신 나라의 첫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다윗이 왕이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모셨습니다. 기름은 바로 성령님을 뜻합니다. 예수님도 나자렛 회당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이사야서를 반복해 읽으십니다.

성령님이란 바로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을 사랑하셔서 주시는 당신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며, 비로소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아들”이라 선포됩니다.

세례는 그러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 고통을 짊어질 만큼 아버지를 높이고 사랑하기에 아버지께서도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 사랑을 받고 왕이 되어 우리 교회를 위해 이번에는 당신의 피와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피와 물이 죄의 사함과 성령님을 의미하고 지금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사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성사를 통해 죄가 사해지고 오시는 성령님을 모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사해지고 성령님을 받음으로써 우리도 왕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왕은 곧 중재자입니다. 우리도 세례를 받을 때, ‘왕직’을 받습니다. 왕이 된다는 말은 곧 교회의 중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중재자란 곧 믿지 않는 이들을 어머니 교회에 연결시켜줄 수 있는 고리고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이들을 그리스도께 연결시켜주는 ‘선교’란 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뜻이고, 성령을 통하여 왕이 된 사람이고, 그래서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교를 하지 않는다는 뜻은 성령을 받아 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왕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구원받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에스델은 자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씁니다. 즉, 임금 앞에 함부로 나가면 목숨이 위험할 줄 알면서도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무릅쓴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고, 그 밑에서 성모님도 같은 고통을 겪으며 함께 하셨습니다. 선교란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이 된 사람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큰 사랑은 없다고 하는 것처럼, 중재자로서 선교하는 것은 곧 순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서는 어떠한 새로운 생명도 탄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고 싶고 그래서 힘이 세어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인 욕망보다도 더 기본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자꾸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과 같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갔던 것입니다. 그 유혹을 했던 사탄도 사실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에 하느님나라에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높아지려하는 것은 왕직을 잃는 길이고 낮아지고 순종하는 것이 왕이 되는 길입니다. 물론 왕 중의 왕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 안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강했던 인물은 ‘삼손’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를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강했을 때는 사실 어떤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교만해져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자세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를 빼앗긴 분노에 적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쓰시려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큰 힘을 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자만 안에서 한 여자에게 지고 맙니다. 모든 사람과 싸워도 이길 수 있었지만 자신의 육체에는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까지 다 뽑히고 나서야 그는 한 여자도 이길 수 없는 약한 인물이었음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마지막 기회를 청합니다. 모두가 아는 대로 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던 신전에서 적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었습니다.

가장 강할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자신은 “가장 약할 때 가장 강하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가장 강한 왕이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리스도 위에는 “유다인의 왕 나자렛 예수”란 죄목이 쓰여 있었고, 그 분의 머리엔 가시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가장 약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던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것이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인 것입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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