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해설] 고대 종교와 세속 문화가 전례에 미친 영향 고대 종교와 세속 문화는 전례의 외적인 요소를 형성하는 데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는 바, 그 가운데 몇 가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동향(東向) 유다인들은 기도할 때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였다(다니 6.10 참조). 그러나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옛 문화 민족들과 여러 미개 민족들은 기도할 때 동향하는 관습이 있었다. 태양이 솟아오르는 동쪽을 생명과 힘과 기쁨이 나오는 곳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기도시 동향했는데, 이미 l세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 동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에서 승천하셨던 것처럼, 그분이 또한 동쪽에서 다시 오실 것이라 믿었다(마태 24,27; 묵시 7,2 참조).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를 태양으로 표현하기 시작하자 강화됐다. 예수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8,12)이라고 하셨다. 고대 세계의 태양에 관한 모든 칭송들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연관시켰다. 그래서 그분은 구원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구원의 태양(Sol Salutio)으로 인식됐다. 3세기말경 로마 제국에서 태양 숭배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이러한 생각은 더욱더 강화됐다. 사람들은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며 부활을 생각했고, 예수의 탄생도 첫번째 태양의 솟아오름으로 생각했다. 한편 로마에 있는 베드로 교회의 대발굴 때 3세기의 그리스도교적 미술에서 요나에 관한 유명한 그림과 함께 모자이크로 된 태양신이 묘사된 작품이 발견됐는데, 태양신 묘사는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태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세주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집이나 그 밖의 다른 장소에서 사적으로 기도 드릴 때에도 동향하는 풍습을 지켰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에도 물론 동향을 엄수했다. 그래서 교회 건축물 자체도 떼르뚤리아노가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항상 빛을 향해(ad lucem)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신전들은 보통 동쪽을 바라보게 지어졌고, 신전의 문들을 열어 젖혔을 때 솟아오르는 태양의 광선이 신상(神像) 위에 내려 비추도록 했듯이, 가장 오래된 교회 건축물들은 적어도 로마에서 동쪽으로 난 입구를 가졌다(예 : 성 베드로 대성당, 라떼라노 대성당). 그것은 물론 불편한 점이 있기도 했는데, 공동체가 동쪽을 향해 기도드리려면 공동체는 사제와 함께 교회의 입구를 향해 방향을 바꿔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불면을 없애기 위해 4~5세기에는 여러 곳에서 전례 집전자가 전례 집전을 하고 있는 곳을 동쪽으로 향하게 교회가 지어졌다. 동향하는 풍습은 또한 묘지의 시설에서도 나타난다. 무덤 십자가들과 묘비명들은 도로나 교회를 바라보지 않고 동쪽을 바라본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은 부활하신 분이 그들을 부활하도록 부를 때,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는 큰 무리와 같다. 세례식 고대 이교도들은 어린아이에게 우유와 꿀을 건네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어린아이가 이제 그 가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표시했다. 이러한 풍습이 전례 안에 받아들여져 새 영세자들의 첫영성체 때 성혈을 담은 성작을 건네주기 직전에 새로 탄생한 사람의 음식으로 우유와 꿀을 한 모금 건네주었다. 이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안내하는 상징으로 이해됐다. 결혼식 고대 사회에서 화관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 화관은 악령을 막기 위한, 그리고 동시에 종교적 축성의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결혼식 화관은 처음엔 이교도들의 풍습으로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부됐다. 그럼에도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크리소스또모는 이 풍습에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으니, 그는 이 화관들을 승리의 화관들이라 말했다. 이 화관들은 동시에 신랑 신부의 일치를 상징했다. 장례식 옛 로마와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죽은 이의 장례일이나 기념일에 ‘사제 밥상 혹은 위안상’을 차리는 풍습이 있었다. 이 풍습은 죽은 이의 무덤 옆에서 여러 기회에 가졌던 식사인데, 이때 죽은 이도 참가자로 간주했다. 이런 풍습을 통해 사람들은 죽은 이에게 음식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죽은 이를 잘 기억하고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곳에서 남용되어 교회에서는 이를 금지시키고 성찬례로 대치하였다. 물론 교회는 이미 2세기에 외경(外經)인 요한 행전이 전하는 대로 매장이 끝나고 성찬례를 거행했다. 죽은 이를 위한 미사 봉헌은 초기 교회에서 이미 장례식과 연결됐던 것이다. 또한 위령 전례 거행을 위한 날짜를 선정하는 데 있어서도 고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사후 제3일, 제7일, 제9일, 제30일, 제40일에 거행된 위령 기념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신례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즉시 영혼이 육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옛 사람들의 조상 숭배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 교부들은 이러한 옛 사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의 생각과 대중의 관습이 쉽게 없어지지 않게 되자, 교부들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념일들을 존속케 하고,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했다. 제3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일, 제40일은 그분의 승천일로 죽은 이들에게도 그리스도와 똑같은 길을 가게 하기 위해 제3일, 제40일에도 와주려고 한 것이다. 제7일은 주일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30일은 구약 시대에 모세와 아론을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각각 30일 동안 슬퍼했다는 사실과 연관짓는다(신명 34,8; 민수 20,29 참조). 전례력에 끼친 영향 4월 25일의 청원 행렬은 같은 날 거행되는 성 마르코 축일과는 무관한 데, 청원 행렬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로마의 옛 풍습과 관계 있다. 옛 로마에서 매년 4월 25일 로비고(Robigo) 여신을 공경하기 위해 들판을 통과하는 하나의 행렬이 있었는데, 이런 행렬을 통해 사람들은 곡물에 깜부기가 생기지 않도록 기원했다. 이러한 청원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느님께로 향하게 됐다. 이 청원 행렬은 새 규정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없다. 2월 2일에도 주의 봉헌 축일과 무관하게 속죄 성격을 지닌 행렬이 있었다. 이 행렬에 참가한 교황과 그의 보조자들은 맨발로 걷기도 했다. 이러한 행렬은 옛 로마인들이 도시를 빙 돌아서 걸었던 행렬(Flmburbale)의 영향인데, 이것은 속죄 예식이었다. 이교도의 축제로부터 날짜를 양도받은 대표적 예는 성탄 축일이다. 옛 사람들은 생일 축제를 위해 항상 본래의 생일을 택했던 것은 아니고 자주 상징적으로 중요한 다른 날을 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일 축제는 경우에 따라서는 죽은 다음까지 거행됐다.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주님이요 왕의 탄생 축제를 장엄하게 거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본래의 탄생일을 몰랐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선택했다. 그럼 왜 12월 25일이 택해졌나? 그리스도의 잉태는 3월 25일이고, 이에 따라 그분의 탄생은 9개월 후인 12월 25일이라는 가설이 있으나,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로마에서 그 당시 아주 화려하게 거행했던 “무적의 태양 탄신일”(dies natalis Solis invicti)이라는 이교도의 축일에서 유래한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274년 이 이교도들의 축제를 로마에 들여 왔다. 그는 주신(主神)으로서 승리의 태양과 함께 통일된 제국 종교를 도입하려 했다. 그는 하나의 거대한 태양 신전을 세웠고 독립된 사제단을 임명했고 12월 25일을 국경일로 만들었다. 이와 관련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빛이요 태양이었던 그리스도를 그만큼 결정적으로 지적한 것은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이 이제 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dies natalis)로 거행하기 시작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이 성탄 축제는 33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말년에 거행되었음이 확인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축제가 거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 축제는 급속한 속도로 퍼졌고 380년에 이미 콘스탄티노플에서 거행됐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동시대에 이미 육화(肉化)의 거행을 위한 고유한 축제를 형성했으니 1월 6일의 주의 공현 축일이다. 이 축제 역시 이교도들의 태양 축제의 영향을 받았다. [경향잡지, 1989년 9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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