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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보시기에 참 좋았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5 조회수897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4 주간 목요일 - 죽음을 친구로 두고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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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셨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죽기만을 바라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기어이 “이젠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은 이유는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겠지만, 정작 사랑만이 살아갈 참다운 이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죽고 싶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정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죽음을 직전에 두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암벽을 등반한다든가 번지점프를 하면서 살아있는 쾌감을 느낍니다. 죽음 옆에서 삶을 더 느낄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조되는 것 옆에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을 더 잘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참으로 여자가 될 때는 남자와 가까워질 때이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될 때도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합니다.

 

1986년 1월, 6천만 미국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린져 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 우주선의 비행사들이 남겼던 마지막 대화가 공개되었습니다.

남자: 무슨 일이지? 오, 맙소사. 안 돼. 오 안 돼.

여자: 오! 이런.(비명소리) 너무 뜨거워(신음 소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말하지마. 오 지금 하세요.

여자: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안 돼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남자: 당신의 팔이... 안 돼.

여자: 전 의식을 잃어가고 있어요.

남자: 우리는 아직은 죽지 않아.

남자: 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신음소리)

남자: 그녀가... 그녀가... 죽...

남자: 공기가 없어

남/여자: (신음소리) 오 안 돼.

남자: 그녀가 의식을 잃었어.

남자: 그녀에게 행운이 있기를

남자: 오 하느님! 우리가 죽어가고 있어요. (비명소리)

여자: 안녕(신음하면서) 사랑해요.

남자: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긴장을 풀라고!

남자: 어딘가에 비상 착륙을 할 수 있을 거야!

남자: 그래. 맞아 .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남자: 비상 착륙을 시도해봐.

남자: 오, 그건 불가능해.

남자: 손을 내밀어봐.

남자: 거기에 있어? 깨어 있느냐고? 난... 난...

남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남자: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남자: 괜찮아?

남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심이로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 (침묵).

 

첼린져호 조종사들이 죽음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는 죽음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우리를 살게 하는지 잘 느끼게 해 줍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찾고 사랑을 찾았습니다.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그 전에 이만큼 절실하게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참으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거의 매일 종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복음들을 읽다보면 종말이 매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마음을 북돋아줍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은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의 ‘신랑’과 만나는 기쁜 날입니다. 죄인들만이 두려워 떨어야 하는 날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옆에 끼고 친구처럼 지내야합니다. 그래야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도 끝기도에 항상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잠자리, 이것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이름을 남기려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장 내일 죽게 된다면 적어도 이것은 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삽시다. 진정으로 사는 맛을 느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희 교구 차는 99년산 대우 라노스였습니다. 워낙 오래되다보니 차에 들어가는 돈이 매우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하나가 또 고장 나고 하면서 유학사제들의 주머니를 터는 주범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큰 결정을 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차를 고치다보니 이번에는 엔진이 문제라 엔진을 통째로 갈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엔진을 중고로 바꾼다고 해도 그런 차를 다시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차를 폐차 시키자, 그러지 말자.”라는 소리가 나올 때, 저는 그러지 말자라는 쪽으로 손을 들었습니다. 엔진만 바꾸면 그동안 워낙 많은 것들을 고쳐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장 날 것이 없을 것만 같았고, 정든 친구를 잃는다는 마음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죽을 뻔 하였던 라노스는 다시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동안은 잘 탔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차가 길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레커차에 실려 정비소에 가보니 이번에는 기름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수 백유로가 수리비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저는 다시 갈림길에 섰습니다. 지금까지 이 차를 위해 투자한 돈이 너무 아깝기는 하지만 교구 사제의 주머니를 계속 털어버리게 더 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폐차를 결정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차를 고쳐오던 정비소 아저씨도 매우 마음아파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계속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이기에 그 차는 지금 산산이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정비소 아저씨보고 엔진과 전에 새로 갈았던 부속들은 빼서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직까지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멸망시키려고 창조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참 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파괴하기 위해 예술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종말에 관한 독서와 복음을 읽고 있으면, 하느님이 세상을 꼭 멸망시켜야 하시는 분처럼 나오지만, 실상은 세상을 멸망시키게 하는 당사자들은 인간 자신들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오래오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시지만, 더 이상 쏟아 붓는 은총이 헛되게 낭비될 때 마음 아픈 결정을 내려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과 하느님의 진노와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은 하느님께서 참고 참으시다가 그 참아왔던 당신의 진노를 세상에 풀어버리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치 폐차를 시키더라도 좋은 부속들은 빼 내는 것처럼, 그 안에 남아있는 몇 명의 의인들까지 파괴시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파괴하시기 이전에, 그 안에 의인 다섯만 있어도 그들 때문에라도 파괴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차를 폐차시키기 이전에 새로 갈아놓은 그 좋은 부속들이 아까워서라도 최대한 사용해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이상 운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폐차를 시키는 것이고, 그 때 세상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빌론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또 로마에게 멸망할 때도 예루살렘의 성전 안에는 하느님이 사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곧 종말을 앞당기는 길입니다. 성전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돌덩이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그 분이 계시지 않으면 곧 진노와 멸망이 임박한 것입니다.

한 자매님은 우울증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기기 위해 성지순례, 성령세미나 등도 열심히 다니시고 하루에도 기도를 몇 시간씩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냉담을 하게 되었고 다른 이상한 종교에 빠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겉으로는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듯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자신이 먼저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하느님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종말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다시 돌아올 기회를 또 주십니다. 그러나 정 안되겠다 싶으면 유다처럼 손을 놓으실 날이 있습니다. 그 날이 참 죽음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참 좋으셨다고 하셨을 때의 그 모습을 유지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노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믿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가, 누구는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을 살고, 또 누구는 영원한 생명에 더 가까워지는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죽음을 부르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때, 그 때가 세상의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The Prayer>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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