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당당하게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6 조회수641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연중 제 34 주간 토요일 - 항상 감사하십시오.


 

신학교 1학년 때 담임 신부님께서 “사제는 여자, 술, 돈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술을 잘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습니다. 신학생이 되어서는 술 마시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술을 끊어본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 안 가서 또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요즘에 와서야 왜 이렇게 술을 절제 없이 마시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런 호르몬이 나온다고 합니다. 자신감도 있어져서 자신 있게 말도 할 수 있고 맨 정신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한 대가로 술을 깰 때는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침이 힘들어서 후회도 됩니다. 정말 많이 마셨을 때는 ‘다시는 술 마시나봐라’라고 결심을 하지만 며칠 안 가서 다시 마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즐거움을 누려보려는 마음 때문이고 그 이면에는, 지금 나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사실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사실 정말 평상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술을 적게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고, 술이 쓰면 인생이 달다.”

 

인생이 써서 술을 찾게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성경에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첫 기적이 술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바오로는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하라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말라는 말은 많이 나옵니다. 술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1935년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젊은이가 시대의 흐름과 여론을 수집, 분석하는 연구소를 창설했습니다. 바로 조지 갤럽의 '미국여론연구소'가 그것입니다.

이후 이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기반을 넓혀나갔습니다. 갤럽이 원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최대관심사가 '행복'이란 것을 알고 그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놓고 한 텔레비전과 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갤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마약 중독자와도 같이 외적인 힘으로 우울해진 마음을 위로해보려 합니다. 물론 취해 있을 때는 인생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술이 깨면 더 큰 공허함과 우울함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또 마시게 되고 그렇게 악순환 됩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기분을 UP 시키는 것은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만큼 DOWN 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짜로 기분이 좋아졌다면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그만큼 나빠지는 것입니다. 어느 때 별 이유도 없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은 다시 자신도 모르게 안 좋아질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도록 자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선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도 항상 인기에 목이 마르고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을 더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모든 행복이 주어졌던 아담과 하와도 또 다른 육체적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금지된 열매까지 따먹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참된 겸손은 ‘내게 허락된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나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크고 작은 기쁨들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엇을 원하고 그래서 불행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란 뜻은, 어쩌면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는 미사 때 주님께 찬미가 저절로 솟아나옵니까?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찬미를 드리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을뿐더러 얻기도 힘든 순간적인 즐거움들을 바라면서 불만족스런 눈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내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당당하게

 

누구도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어 살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안치환의 노래가사처럼 “당당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학교가면 선생님께 주눅 들고, 대학가니 부잣집 아이들에게 주눅 들고, 성당 와서는 신부님께 주눅 들고, 신학교 갔더니 선배들에게 주눅 들고, 사제가 되니 주교님 앞에서 주눅 들었고, 논문 쓰는 지금은 담당 교수 신부님께 주눅 들어 살고 있습니다.

사실 뒤돌아보면 그들이 주눅들만큼 나에게 한 것도 없는데 마치 그래야 당연한 것처럼 그렇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기도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기도하라고 하시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는 고해성사 때 한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기 위해 밖에 줄서서 기다리며 그렇게 떨리는 것을 체험하고는,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두려운데, 하느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더 두려울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사제직을 만들어 당신 자신이 아닌 한 똑같은 죄인에게 죄를 고백하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은총입니다. 지금도 한 사제에게 서기가 부끄럽고 두려워서 고해성사를 꺼리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 예수님이 직접 앉아 있다면 고해를 보겠다고 힘을 내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 때문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충혈 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 앞에서 죄송하고 부끄러워 어떻게 머리를 들고 입을 뗄 수 있겠습니까?

살아계실 때 함께 지내던 사도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얼마나 겁에 떨었는지 성경은 잘 표현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 번,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라고 그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히는 첫 기적을 체험하고 납작 엎드리며 주님께 자신을 떠나가시라고 청합니다. 마귀를 돼지에게 들어가게 하여 돼지들이 물에 다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그렇게 자신들을 떠나달라고 청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턴가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당당히 설 수 있는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였지만, 죄를 짓고 나서는 그 분의 목소리마저 듣는 것이 겁이 나서 자신을 숨겼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잘못을 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을 씻고 잃었던 성령님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기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지기 시작하면 자연적으로 사람들도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양심의 가책도 너무 아프기에 사람들에게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게을러지고 사람 만나는 것을 꺼리게 됩니다. 자기 방에 갇히게 되고 자기 자신에게 갇히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자주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공손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후배들에게는 매우 권위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면 빨리 고해성사를 보고 기도시간을 늘려야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면 더 이상 그분 앞에 설 힘이 없기에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도 죽는 것이 싫어 온갖 건강식품을 챙기고 있을 것입니다.

각자의 마지막 날이 눈앞에 있습니다. 1999년 4월 20일, 콜로라도 덴버의 한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두 학생은 학생들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가?”

대부분의 학생들을 살기 위해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캐시 버낼이라는 한 학생은, “나는 지금도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어. 너희도 하느님의 길을 따라야만해.”라고 하였고, 총을 들고 있던 학생은 “그럼, 네가 믿는 하느님의 곁으로 가라”하며 총을 쏘았습니다. 결국 그 자리에서 캐시 버낼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이 사건은 미국 전역의 학생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10대들 사이에서 신앙 붐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캐시 버낼의 죽음이 신앙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이현구, ‘비교급에서 최상급으로’, ‘참 소중한 당신’ 2010년 12월호 19-20쪽에서 재 참조)

만약 우리 자녀들이라면 어떻게 하도록 가르치겠습니까? 총구 앞에서 당당하도록 가르치겠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을 갖고 살도록 가르치겠습니까? 하느님의 생명의 책에는 당신을 증언한 이들의 이름만이 적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힘을 기릅시다. 하느님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데, 누구 앞에서 주눅들 수 있겠습니까?

 

 

 

< 하느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