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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8 조회수827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1 주일 -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


 

한 번 ‘결국 나는 혼자구나!’와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를 동시에 느껴본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생일날이었는데 저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 모였었습니다.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불을 끄고 따라주는 술을 마시고 할 때는 잘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제 얼굴을 케이크로 범벅을 만들어서 화장실에 가서 물로 씻었습니다. 워낙 기름기가 많아서 씻는데 고생을 하였고 시간도 좀 흘렀습니다. 누가 좀 도와주러 올 줄 알았는데 오지도 않고 나가보았더니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끼리 즐거워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위해 해야 할 모든 축하가 끝난 지금 더 이상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평상시엔 잘 외로움도 느끼지 않았는데 그 날은 주인공이 되었다가 순간 관심을 받지 못해서 그랬는지 심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외로움을 더 느낄 수 있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외로움이란 것이 결코 사람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생일날 외로움을 느끼니 술이 더 잘 들어갔습니다. 막 퍼마시고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는데 순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왁자지껄 하던 분위기에서 잠시 벗어나 비록 냄새나는 화장실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 있으니 저절로 그분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고 소변을 보면서 그 분과 대화도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서야 비로소 사람들과 있을 때 하느님을 잊게 되고 그래서 더 외로워지고, 혼자 있을 때 오히려 그 분을 만나 행복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수도회에 들어간 친구에게 이 경험을 ‘화장실에서 만난 하느님!’이란 제목으로 써 보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는 것 자체가 그분을 만나는 시작임을 깨달았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산 위에서 혹은 아무도 없는 곳을 즐겨 찾아 기도하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합니다.

 

오늘이 대림 1주일이지만, 복음은 여전히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하느님께서 방주를 만들라고 해서 홍수의 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세상에서 일하고 결혼하고 즐기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노아는 세상과 떨어진 왕따였습니다. 그러나 그 혼자 있음이 하느님을 만나게 하였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알아서 혼자가 되었는지 혼자여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세상과 떨어질 줄 알았기에 그 날이 올 것을 깨어 기다릴 줄 알았던 것입니다.

성인들의 축일은 대부분 돌아가신 날로 정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 돌아가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 하늘에서 새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시작을 위해선 이전 것이 끝을 맺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그 때가 곧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고 종말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때가 개인적인 종말이요 죽음의 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그래서 깨어있으라고 당부합니다. 그에게 잠자는 것이란,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사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오히려 잠자는 시간인 것입니다. 반대로 홀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깨어있는 시간입니다. 어쨌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며 하느님을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깨어있는 것이고, 깨어있을 때 오히려 더 외롭지 않습니다. 노아가 과연 혼자 왕따가 되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 배를 만들 때 외로웠을까요? 정작 외로운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내고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외롭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외로운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하는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하기 때문에 외로워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고 홀로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외롭지 않은 사람이란 것입니다. 문제는 외로운 사람들은 사람을 만나기는 원하지만 사람을 만나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나기를 원치 않고 그래서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지게 됩니다.

반면 홀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혼자 있어도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 이렇게 외로움을 극복한 사람들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홀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을 홀로 있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사람을 더 못 만나게 되고 홀로 있기를 즐기는 사람은 홀로 있게 되지 못하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떤 사람이 헤어진 이유를 남자 친구가 자신을 만날 때 자꾸 자기 친구들을 불러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둘 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남자친구는 여자도 중요하고 자신의 친구들도 중요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남자가 여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의 친구들과 더 우정이 깊어졌을까요? 아마 슬픔에 잠겨 친구들도 만나기 싫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하느님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를 먼저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것도 저것도 다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나라를 구하여라.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번 애인과 친구들을 함께 만나면서도 그 남자도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애인을 자주 만나줬는데도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다고요. 그러나 분명 애인과 친구는 다른 것입니다. 애인은 둘만의 비밀스런 관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애인과 다른 사람들과 동시에 만난다면 애인과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과 함께 있을수록 애인과의 관계가 멀어질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의 시선은 한 가지만 보도록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애인은 항상 자신을 생각해 주고 항상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원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바라 볼 때는 애인은 시선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바라보는 눈의 초점은 한 곳을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애인은 그 초점이 항상 자신에게만 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와가 원죄를 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죄를 짓기 시작했을까요? 바로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탄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부터였습니다. 아담은 언제부터 죄를 짓기 시작했을까요? 하느님을 보지 않고 하와만 바라보게 된 때부터였습니다. 이 둘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쓰여 있지만 사실 하느님은 항상 함께 계셨었습니다. 다만 인간이 죄를 짓기 위해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 눈을 감는 것이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눈을 돌렸더니 바라보던 사람과 친해졌습니까? 죄를 지은 순간부터 여자는 뱀과 원수가 되고 남자는 여자에게 핑계를 돌리며 서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애인을 잃은 남자가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먼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이 관계를 가지려고 했던 것들까지도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많이 바라보고 싶어집니까, 아니면 싫은 사람이 더 보고 싶어집니까? 물론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한 없이 바라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와가 하느님께 시선을 떼고 뱀을 바라보고 아담이 하느님께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와를 바라보았다는 의미는 결국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선을 다시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하늘은 무한히 넓고 눈만 들면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넓은 하늘을 하루에 몇 번이나 보고 삽니까? 바쁘게 살다보면 하늘 한 번 보지 못하고 하루가 흘러갈 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면서는 좀처럼 하늘을 보기가 힘듭니다. 하늘을 보려면 홀로 있는 시간이 가장 좋습니다. 홀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볼 때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더 바라보는 사람이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홀로 기도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그것을 채우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혼자 기도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사람이 미워질 정도로 기도에 맛을 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깨어있는 시간이 홀로 기도하는 시간임을 절대 잊지 맙시다. 

 

 

< 아무 것도 너를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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