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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과 희망은 사랑의 두 날개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29 조회수971 추천수17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 1 주간 월요일 -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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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극 같은 데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많이 묻는 질문 중에 하나가 "나를 왜 사랑해?"입니다. 연속극 남자 주인공들은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준비된 멋진 멘트를 마구 날립니다.

사실 저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당황해서, “사랑에 이유가 있어? 부모님은 너를 왜 사랑하는데?”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에서는 ‘사랑하면 행복하잖아!’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행복을 위해 사랑한다는 말은 이기적인 것도 같고 사랑에 의도가 섞여있는 것도 같아서 그렇게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위에서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섞여있는 사랑의 모습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그러라고 가르치니까 억지로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영애씨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납니다.

한 여자 감옥에 예쁘고 착한 금자씨가 복역하고 있습니다. 살인자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모든 사람에게 너무 친절합니다. 한 여죄수를 괴롭히는 또 다른 잔인한 여죄수를 친절하게 3년 동안 락스를 먹여가면서 죽이기까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매우 친절합니다. 교도소 내에서도 ‘친절한 금자씨’로 통하며 13년간의 복역생활을 무사히 마칩니다.

사실 금자씨는 살인누명을 쓰고 복역 중이었던 것입니다. 금자씨는 자신이 그렇게 친절하게 해 주었던 사람들의 도움으로 백선생 (최민식: 금자씨의 딸의 생명을 담보로 살인 누명을 씌웠던 장본인)에게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복수합니다. 그러니까 친절한 금자씨의 그 친절은 어쩌면 복수를 위한 친절이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복수만을 생각하며 동료 복역수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만은 않았겠지만 그 친절은 어쨌든 복수라는 의도에 조금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의미의 친절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누구와 혼인하는데 그 사람보다는 그 사람의 돈이나 명예, 능력 등을 더 보고 결혼했다면 나중에 그 사람이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한 것보다는 배경을 더 사랑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은 참으로 순수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백인대장은 로마 군대에서 장교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종이 아픈 것을 보고 속국인 이스라엘 한 사람에게 그 치유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지만 저는 그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 더 정이 갔습니다. 자신의 가족도 아닌 자신의 종인데도 손수 주인이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면서 치유를 부탁하는 모습, 그것도 굳이 오실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하라고 하며 그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는 모습, 그 사람은 그래서 완전한 믿음을 넘어서서 완전하게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왜 사랑했을까요? 왜 사랑하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되십니다.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왜 사랑하시려고 하실까요?

저는 “사랑하면 행복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본질이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행복이시기도 합니다. 왜 인간을 창조해서 사랑하시려고 할까요? 당신이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지 않다면 굳이 인간을 창조하셨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할 때마다 “보시니 좋았다!”, 특별히 사람을 만들고는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도 사랑의 모든 행위들을 당신이 좋기 때문에, 당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랑에 ‘행복의 의도’가 들어간다고 느낍니다. 오늘 백인대장도 종을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행복했을 것입니다. 행복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 안에서 행복해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나아서 행복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그런 노력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본질이 사랑이신 이유는 본질적으로 행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행복으로 초대하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랑한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면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우리를 왜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뭐라 대답하셨을까요?

“너희가 행복하기를 바라니까!”

결국은 우리가 행복해지면 예수님도 행복해지십니다. 사랑해서 행복한 하느님나라가 우리 마음에 빨리 오기를 청해봅시다.

 

믿음과 희망은 사랑의 두 날개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란 영화를 어제 보았습니다. 참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한 연극배우 팀이 연극이 잘 되지 않자 사랑을 이루어주는 회사를 차리고, 여자의 심리를 잘 이용해 말도 못 걸고 쳐다보고만 있는 남자들의 애끓는 사랑을 이루어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사귀고 싶어 하는 여자가 그 연애 조작단의 리더인 엄태웅의 전 여자 친구 이민정이었습니다.

둘이 헤어진 이유는 이렇습니다. 둘은 파리 유학 중에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남자가 먼저 일본 여학생과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이민정이 자신의 선배 형의 집에서 자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엄태웅은 둘이 절대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를 믿지 못하며 자신을 배신했다고 따집니다. 그래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드는 양심의 가책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를 더 의심하게 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여자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엄태웅을 그렇게 떠났고, 지금 몇 년 뒤에 한국에서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엄태웅은 과거를 잊고 다시 이민정과 사랑을 시작해보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옛 애인에게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즉,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듯 이민정과 사귀고 싶다는 최 다니엘을 최대한 밀어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해변에서 이루어지는 프러포즈 신에서, 최 다니엘의 입을 통해 엄태웅은 믿지 못해 자신을 떠나가게 한 이민정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충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오는데, 예전에는 그 중에서 왜 사랑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어.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 하지. 그런데 이젠 알 것 같아. 믿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믿는다는 걸... 조금만 더 사랑했다면 다 해결될 문젠데...”

엄태웅은 이런 말을 최 다니엘의 입을 통해 전달해줍니다. 이민정은 이 말이 자신의 옛 남자친구의 말인지도 모르며, 그렇게 말해주는 최 다니엘을 좋아하게 됩니다. 자신의 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연결시켜주는 엄태웅은 그렇게 또 사랑의 아픔 속에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여전히 먼저 믿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먼저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 또한 믿지 못하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 편으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도 맞습니다. 믿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 믿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기 위해 믿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믿고 희망하는 것은 사랑을 목적으로 합니다. 만약 이미 사랑하고 있다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믿음을 지닌 로마 백인대장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또 그 분이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것까지 눈으로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믿음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고 믿을 수 있게 되었을까요? 왜 남들은 믿기 위해 기적을 찾아다니기 바쁜데 그는 집에 앉아서 그것도 속국의 한 가난한 청년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고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기적을 청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다른 것보다도 그 백인대장의 인간성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제치하 때 일본 장군이 자신의 종을 위해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하는 우리나라 시골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며 기적을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나 가족이 아픈 것도 아니고 종이 아픈 것인데도 자신의 종을 위해 그렇게 겸손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사랑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지만, 믿음이 커지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그 안에서 작은 믿음의 씨앗이 누구보다 빠르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만 사랑은 그 믿음을 완성합니다. 믿고 사랑하는 만큼 희망하고 그래서 겸손되이 자신의 종을 위해 기적을 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미 그 분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면 그 믿음을 증가시키기 위해 그분을 더 알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됩니다. 언제까지고 기적이나 특이한 현상들을 보고 믿음을 증가시키려고 한다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아니면 더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마치 사랑의 양 날개처럼 사랑을 높이 끌어올립니다. 그리고는 그 사랑과 함께 같은 높이를 유지하게 됩니다. 믿고 바라지 않는데 사랑할 수 없고, 사랑하는데 믿고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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