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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정한 닮음과 기회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2 조회수371 추천수6 반대(0) 신고
 
 

진정한 닮음과 기회 - 윤경재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마태7,21-23)

  

영국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쓴 풍자소설 ‘주님’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저녁이 되어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은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때 요셉은 벌거벗은 채 가시로 자기의 몸에 상처를 내고 머리에는 재를 관처럼 쓰고서 울고 있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 요셉은 이 젊은이에게 “젊은이여! 당신이 슬퍼하는 이유를 나는 알 듯합니다. 우리 주님이셨던 예수는 정말 위대한 분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셉은 이 젊은이가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줄 알았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때 젊은이가 대답했다. “선생님, 나는 예수를 위해 울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울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나도 물로 술을 만들었습니다. 나도 문둥이를 고쳤고 눈먼 자를 보게 해 주었습니다. 나도 물 위를 걸었으며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광야에서는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사람이 행한 것을 나도 모두 다 해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그 뜻을 실행한 예수와 그렇지 못 한 젊은이를 대조하여 쓴 글입니다. 그 젊은이는 예수가 보인 모든 일을 자신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실제 예수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굳이 예수가 주님일 까닭이 없다고 주장한 셈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서 갈채와 존경을 받는 예수의 성공을 닮고 싶었지만,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만 실족하고 말았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에 다다르자 허공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타인들에게 핑계를 돌렸습니다.

현세에서 아무리 기적을 행하고, 병자를 고쳐주었으며, 신묘한 능력을 펼쳐 보이고, 자선을 베풀었더라도 그 의도가 자신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말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 글을 통해 예수의 참모습을 닮으려 하지 않고 성공 지상주의에 빠진 사람들과 교회의 모습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를 잘 믿으면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공할 거라는 성공증후군에 감염돼 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공을 담보로 세 불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듣기에 거북한 말씀’(요한6,60)은 살짝 빼어 놓고 설교합니다. 그래야 청중들이 열광한다는 것을 경험했고 그래야 유능한 설교가라 칭송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애쓰라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성공, 어리석은 헌신, 쓸쓸한 퇴장을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미리미리 제때에 실행하라고 보여주셨습니다. 

네 복음서에서 예수께 향유를 바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 최상의 칭찬을 들었으나 한 번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베타니아에 계실 때 일입니다. 한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부어 드렸습니다. 통회와 감사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그녀는 3백 데나리온 어치나 되는 귀한 것을 한순간에 낭비하였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준비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다른 장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준비한 무덤에 묻히셨을 때입니다. 주님의 돌연한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여인들이 마지막으로 할 일을 생각해내고,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마침 다음날이 안식일이라 하루를 쉬고 셋째 날 아침 일찍 향유를 가지고 무덤에 갔으나 그만 준비해 간 향유를 한 방울도 사용해보지 못 했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주님께 봉헌하는 향유라야 제대로 쓰이는 것이지,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고 안타까워하며 바치는 향유는 아무짝에도 쓸데없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익명의 나그네로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 나그네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합니다. 뒤늦게 떠나가신 분의 이름을 부르며 ‘주여, 주여’하고 찾은들 아무 쓸데도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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