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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적망강산, '나'를 부르는 소리>-반예문 신부님
작성자장종원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2 조회수531 추천수4 반대(0) 신고
 

적막강산, ‘나’를 부르는 소리

예수, 그대 2010/08/02 13:37



그리고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 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그분은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분이 선뜻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섰다. (마르 1,16-20)




콕콕

콕콕콕

새 한 마리

꼭두새벽까지 자지않고

깨어나

일어나

어둠의 한 모서리를 쫀다


콕 콕콕 콕콕콕......



이윽고 먼데서

닭울음소리 개울음소리 들리고

불그레 동편 하늘이 열리고

해 하나 불쑥 산 너머에서

개선장군처럼 솟아오른다 


이렇게 오는 것일까 세상은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고

새 세상은 정말

새 세상은 정말

어둠을 쪼는 새의 부리에서 밝아오는 것일까



김남주의 ‘적막강산’이란 시입니다. 예수의 나이 서른 살 즈음이라 합니다. 요즘이야 수명이 길어져서 대수롭지 않은 나이, 뭐든지 언젠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겠지만, 글쎄요. 험한 세월을 살아야 했던, 솔직히 견딘다고 말해야 옳을 시절이고 보면, 꽤 늦은 나이에 ‘어둠의 한 모서리를 쪼기 시작했다’는 것이겠지요. 그동안 예수는 숨죽여 흘린 눈물이 많았겠지요. 알다시피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마리아의 기사만 나올 뿐 요셉의 기사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학자들은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한 때는 마리아 혼자 어린 예수를 안타까이 키웠을 테고, 이윽고 예수가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셨겠지요. 예수가 그 나이 먹도록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면 두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너무나 가난한 나머지 신부를 데려올 지참금이 없었거나, 다른 품은 뜻이 있어 미루어두었겠지요. 우린 그저 ‘어쩌다보니’ 나이가 먹었다고 하지만, 예수의 이후 행보로 보아, 더 비상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예수는 한 여인에 대한 연정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라고 왜 여인을 품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사랑스러운 여인이 주변에 왜 없었겠습니까? 그 사랑마저 접어두고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쓰럽고 비장한 노릇입니다. 사람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이 한정된 것이라면, 그는 다른 데 그 힘을 집중하고 싶었을 테지요.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만나 그 에너지의 방향을 찾았던 것이지요.


나와 함께 걷자 


요한에게도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 역시 새로운 세상을 일구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필요했습니다. 혼자서는 될 법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나를 버리고 가면, 그 생명을 나누어 가질 ‘새로운 가족’이 있어야 하겠지요. 당시엔 많은 예언자들과 신비가들이 몸을 일으켜 제자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유다교의 랍비들도 제자를 거느리고, 제자들은 한 걸음 뒤에서 스승을 따라 걷습니다. 스승에게 세상이 낳은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 역시 그러했던 거지요. 그런데 예수는 다른 예언자나 랍비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는 가림 없이 모든 이에게 곁을 주었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함께 걸어갈 친구들은 직접 선택했습니다. 다른 예언자나 랍비들에겐 그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몰려들었지만, 이름없는 고을 나자렛의 예수는 사람을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먼저 “나와 함께 걷자”고 청했습니다. 제자들의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목수가 쓸만한 연장을 고르듯 예수는 직접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가서 “내 뒤를 따르시오” 그 한마디면 족합니다. 그들이 즉시 응답하고 따라나섰다는 것은 이미, 예수가 그들을 알았다는 것이고, 그들 역시 ‘양들이 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예수를 알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실천’이 요구되는 때


복음서에선 예수가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첫 제자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이들은 복음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만큼 예수가 신중하게 고른 제자입니다. 그분과 가장 잘 의기투합했던 사람들이었겠지요, 사전에 예수를 잘 알고 있었고, 아마도 예수는 여러 차례 그들과 생각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안드레아는 예수를 따라간 적이 있었지요. 그는 예수가 묵는 곳에서 온종일 함께 지내며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를 보고 맛들였을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가서 “메시야를 보았다”고 말했지요.(요한 1,35-42참조)


예수의 첫 제자들은 모두 어부였고, 제 힘을 빵을 버는 자들이었습니다. 힘써 일하고 정직하게 생계를 도울 줄 아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제일 먼저 부르심을 받습니다. 여기에 지식인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 생전에는 제자들 가운데 바오로 사도와 같은 지식분자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해석’이 필요한 시절이 아니라, ‘실천’이 요구되는 때였던 것이지요. 거친 바다(호수)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람 냄새를 맡으며 어깨에 하얀 소금기가 말라붙을 때까지 일하던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예수가 꿈꾸던 것을 꿈꾸게 하려고


첫 제자들은 또한 세례자 요한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에게서 배운 것이 예수에게 와서 숙성됩니다. 사제가문에서 자란 세례자 요한이 낳은 하늘에 관한 지혜가 노동하는 인간의 가문에 속한 예수에게서 더 깊이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그 절정은 예수가 나무와 한 가지가 되어 골고타의 흙에 뿌리를 박을 때입니다. 그때 한 백부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나오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이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마태 27,56). 하늘은 땅바닥에 깊이 내려앉은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하늘임을 증거하는 법입니다. 가장 겸손하게 내어놓은 목숨 앞에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게 드러납니다. 죽음조차도 그분을, 그분이 설파한 진리를 잡아두지 못합니다. 그리로 가는 여정에 함께하는 동반자들이 제자들입니다.


첫 제자들은 예수가 “내 뒤를 따르라”고 말했을 때 토를 달지 않습니다. 당장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풍랑을 가라앉히는 기적도,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도, 빵 몇 조각으로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도 보기 전이었지요. 평소 생계를 위한 노동을 마다하지 않던 그들이 틈틈이 요한의 설교를 들으러 강가로 나갔을 텐데, 그들이 갈망하던 무엇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갈망이 없었다면 예수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뜻’에 동의했던 것이지요. 그 뜻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분명히 예수가 가르쳤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 비전을 나누고, 더 많은 이들이 예수가 꿈꾸던 것을 꿈꾸게 하려고 물고기를 잡던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들은 예수처럼 벌거벗은 가난, 적빈(赤貧)의 처지가 아니었지요. 당시 갈릴래아 호수에는 ‘제우스 파베르’라고 부르던 값진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어부들은 이 물고기를 잡느라 투망을 던지거나, 배 두 척 사이에 그물을 쳐놓고 고기잡이를 했답니다. 여기서 시몬과 안드레아는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특히 야고보의 아버지 제베대오는 삯꾼을 두고 일할만큼 비교적 넉넉한 형편이었습니다. 이 기득권과 가업(家業)을 두고 길을 나선다는 게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언젠가 예수가 비유했듯이, 진주가 묻힌 밭을 발견하고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농부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시몬 베드로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시몬 베드로가 그마저 간단없이 접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일’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잠시’ 생계를 접고 대업(大業)을 이루자는 것이겠지요. 그만큼 유다의 상황은 긴박했고, 백성들의 갈망이 끈질겼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식구들과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도 가시고(요한 2,1-12 참조),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자, 예수는 장모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기도 합니다.(마르 1,29-31참조)


그러나 예수는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어떤 경우엔 “당신은 나를 따르시오.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두시오.”(마태 8,22)하고 야박하게 말하고, “누구든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루카 9,62)라며 무엇보다 먼저 “뒤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나를 따르시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내가 살고 싶은 곳 /반예문 라이문도 신부(메리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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