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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 “물이 흐르는 도랑”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4 조회수830 추천수16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 1 주간 토요일 - 머슴 사제되기


 

제 이름은 전 삼용입니다. ‘용’자 돌림이고 형제 중 세 번째 태어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밌는 일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처음 본 사람과 통성명을 하는데 제가 “전 삼용입니다.”라고 했더니 그 분이 “별명 말고 이름이 뭐에요?”라고 여러 번 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계속 제 이름을 이야기했지만 그 분은 나중에야 삼용이 별명이 아니라 이름인지 알고 무척 난처해 하셨습니다.

또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머슴 학사님, 머슴 신부님’이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벙어리 삼용이와 제 외모를 생각했나봅니다.

처음엔 이름이 좀 그래서 놀림도 받았지만 지금은 사제에게 적절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제는 머슴같이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은 칭찬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이것입니다.

저를 알던 어떤 자매님인데 저와 그 성당 보좌신부님과 비교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보좌신부님은 잘 생겨서 주위 신자들이 보러 올 정도였고 거기다가 노래도 잘 하고 무척 친절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신부님을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과 제가 다른 점은 저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는데 반해 그 신부님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머물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 신부님처럼 그렇게 멋진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물론 그 자매가 제가 그런 사제가 되기를 바라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 신부님도 훌륭한 신부님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사실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신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지 않고 우리 자신들에게 머물게 하는 경우는 종종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군중들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이 드십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저는 항상 이 부분에서 ‘왜 양들에게 목자를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하지 않고 목자들보고 또 다른 일꾼들을 보내라고 청하라고 하시는 걸까?’라는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목자가 필요한 것은 양 떼요, 추수할 일꾼이 필요한 것은 수확 할 곡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사제가 사제성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나라에 와서 살아보니 여기 신부님들은 좀처럼 아이들에게 사제가 되라고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은 괜찮다 싶으면 우선 남자아이는 사제가 되라고 하고 여자아이는 수녀님이 되라고 합니다. 우선 찔러나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작은 초대가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제로 사는 사람이 올바로 살아서 그래서 너무나 사제의 삶에 만족해서 많은 이들을 사제의 삶으로 초대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흐르는 사제들이 많다면 당연히 성소가 풍부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사제가 된 것도 후회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사제가 된다면 말리고 싶다고 말하시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부님들은 사제성소가 많이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나라는 성소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어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악령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고 병자를 고쳐주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사제로서의 권한이 자신의 인기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한 사제로서 목자의 가장 좋은 모델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양들을 하나하나 다 사랑하여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이 모델이기는 하지만 더 구체적인 모습이 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한 교수 신부님이 사제는 당나귀 같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왕과 신랑처럼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며 들어가셨습니다. 사제들도 신자들을 예수님께 이끌기 위해 우리 위에 예수님을 태우고 다니는 당나귀들입니다. 당나귀가 혹시 사람들이 하는 찬양이 자신에게 오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그 찬양을 자신이 받기 위해 머리를 들려고 하면 그 위에 타신 예수님은 떨어져버립니다. 머리를 숙이고 계속 걸을 때야만 신랑이신 예수님께 신부를 보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가져야 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하듯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이라야 예수님의 좋은 제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제직을 세우시던 마지막 만찬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이지만 종이 되신 것이고 그런 종의 모습으로 사제직을 수행해야 함을 몸소 가르쳐주셨습니다. 겸손한 사제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청합시다. 또 우리 사제들이 머슴 같고 당나귀 같은 모습을 지닐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인: “물이 흐르는 도랑”

 

처음 신학생 때 유학을 나와서 두 달 동안은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외국 학생들과 이태리어를 배웠습니다. 이태리어를 한국에서 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에 서로서로 말도 안 통해서 답답했고, 또 무더운 날씨에 아프리카 신학생, 인도 신학생과 함께 작은 한 방을 써야했습니다. 그 더운 여름에 서로 다른 몸 냄새를 내는 사람들이 함께 방을 써야한다는 어려움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까지는 다 괜찮은데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사유재산 개념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 친구들은 네 것 내 것 없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가져다 쓰고는 마치 자기 것인 양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내 물건이 없어져서 불편해하고 있을 무렵 다른 친구가 자기 것인 양 당당히 쓰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돌고 돌다보니 내 것이 분명한데도 빌려서 써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 커졌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 전화를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상대방이, “왜 이렇게 ‘내 것’이란 말을 많이 하세요?”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말하는 중에 계속, “내 것인데 저들이 써서 안 가져다주고,...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이란 말들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하였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모든 것, 생명까지도 모두 주님께서 주셨으니 나의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려고 했었는데, 저도 모르게 내 것을 계속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불만족스러울 때 내 것을 더 많이 찾게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니 물질로라도 더 긁어모으며 허기진 마음을 채워보려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께서 부족함 없이 주셨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역, 즉 선악과와 생명나무까지도 넘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생명나무까지는 건들지 못하게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하늘나라란 곳 천상행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거저 받아서 거저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전부’입니다. 내 생명까지도 거저 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받기만 하면서 내어놓지 않으면 모아들이기만 해서 썩어버린 사해처럼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갈릴레아 호수처럼 끊임없이 내어놓아야 합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생명을 의미하고 사해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갈릴레아 호수는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물을 요르단강으로 흘려보내고 그 강이 온 땅에 생명을 주게 됩니다. 반대로 요르단강을 통해 물을 받아들이는 사해는 내어놓지 못해 자신도 소금으로 가득차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물이 되었고 주위도 아무런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것만 찾으면 자신도 죽지만 주위 사람들도 말라죽게 만듭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황폐한 땅에 여러 도랑들이 생기게 되어 대지를 생기 있게 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여기서 이사야가 이야기하는 큰 살육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탑들이 무너지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하고, 높은 산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죽음으로 먼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님을 세상에 뿌려주셨습니다. 이 성령님은 피와 물의 형태로 흘러 나왔고, 교회에서 성사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바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는 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각자 타볼산에서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영광을 세상에 전해주는 도랑 역할을 하도록 파견 받은 것입니다.

준다는 것은 곧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면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당신 먼저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령님을 당신 죽음을 통하여 교회에 흘려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물의 도랑들이 바로 사제들이고 나중에는 신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도랑은 흐르지 않으면 말라버립니다. 내 자신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계속 흘려보내 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적셔야합니다. 예수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시지만, 또한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리 입에서 ‘내 것’이란 말이 나오지 말게 합시다. 내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라 할 때, 그 것에 대한 주인은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됩니다. 내가 사는 집도 내가 타는 차도 나와 함께 사는 사람도 또 나 자신조차도 내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고, 모두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나를 살리는 길이 바로 내가 받은 것을 모조리 줄 줄 아는 삶을 사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명령은 당신이 하셨고, 당신의 제자들이 해야 하고, 또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내가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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