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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물의 세례’와 ‘성령과 불의 세례’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5 조회수378 추천수6 반대(0) 신고

 

‘물의 세례’와 ‘성령과 불의 세례’ - 윤경재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2) 

 

  

요즘은 잘 쓰지 않아 아이들 저금통에나 들어가는 동전을 보면 양쪽 면에 다른 그림이 새겨 있습니다. 한쪽 면에는 숫자 액수와 제조 년과 한국은행이라는 표시가 각인돼 있습니다. 다른 면에는 한글 액수와 누구나 알만한 상징이 그려졌습니다. 한 동전이지만 양쪽 면은 언제나 다른 방향을 향해 열려있기도 합니다. 한번이라도 동전을 뒤집어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쪽 그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초기 공동체는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와 예수께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신 회개가 같으나 또 다른 면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그 차이를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와 ‘성령과 불의 세례’란 구절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같으나 또 다른’ 무엇을 깨달으라는 요구가 담겼습니다. 

단순히 외딴곳인 광야에서 야생의 삶과 극기의 모습을 보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죄에 물든 육신을 고백하라고 외친 세례자 요한을 차별하여 적어 놓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요한과 달리 사람들과 어울리며 음식을 잡숫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시장통에 나가기도 하셨고 창녀와 세리 같은 죄인들과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또 죄에 대한 응징을 최촉(催促)하기보다는 용서를 더 자주 거론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런 차이를 두고 요한이 말하는 물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가 다르다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동전의 이면을 뒤집어 봐야 하나의 동전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뒤집어 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었다는 소명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예’할 것과 ‘아니오’할 것을 거리낌 없이 천명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하느님께 인도하려는 깊은 자비와 애정을 넘치도록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와 성경이 우리에게 가리켜 보이는 두 분의 큰 차이점은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다는 자의식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각 복음서와 서간은 이 문제를 자신들이 이해한 범위로 풀어냅니다. 

마태오와 루카복음서에서는 주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특히 이 점을 중요하게 취급하고 가장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로고스 찬가로 시작하여 예수님의 선재를 노래하였으며 예수께 외아들 칭호를 서슴없이 사용하였습니다. 나아가 예수께서 직접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라고 선언하셨음을 적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고백을 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로마 8,29)라고 선포합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증언하는 단계에서 더 전진합니다. 요한복음서와 바오로서간이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죄인이었던 인간이 아버지 하느님과 또,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토 3,16)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1코린토 6,19)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에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이고 체험적 방법입니다. 종의 병을 치유하는 기적을 요청한 백인대방의 믿음과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자신의 하혈이 멈추리라는 기대를 지닌 여인의 믿음이 그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문제로 스승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니코데모의 믿음이며,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 그 물을 요청한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이 그것입니다. 성경에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았다고 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런 또 다른 길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 깨닫는 길이 쉽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 진리를 깨달으라고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물은 사람에게 차가운 씻김을 체험하게 합니다. 성령과 불은 감동으로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물은 아무리 씻어도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불은 한번 타오르면 그 형질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종이와 나무는 불붙어 타고나면 재가 되어버립니다. 본래의 형상을 찾을 길이 없어집니다. 새로운 변모가 일어납니다. 그런 완전한 변모가 두려워 미적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예수님께서는 그런 변모가 좋은 것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9,3)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라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두렵고 거북한 내용이나 되듯이 다가서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입니다. 예수께 다가가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사상을 주장하는 힌두교나 불교의 가르침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듯이 서로 하나가 되어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그런 방법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7)라고 고백한 소이가 이런 데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한의 지적대로 물의 세례뿐만 아니라 성령과 불의 세례도 함께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형질이 변모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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