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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12. 5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05 조회수458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5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이사11,1-10 로마15,4-9 마태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허무한 삶입니까? 충만한 삶입니까?

 

알곡의 삶입니까? 쭉정이의 삶입니까?

 

열매 좋은 나무 같은 삶입니까?

열매 나쁜, 열매 없는 나무 같은 삶입니까?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세례자 요한의 우레 같은 말씀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주님의 도래에 임박하여 지체 없는 회개를 촉구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이 참 절박합니다.

대림 2주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오늘 강론 제목으로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회개할 때 하늘나라요 하늘나라를 살 때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허무한 삶은 충만한 삶으로,

쭉정이의 삶은 알곡의 삶으로,

열매 나쁜 삶은 열매 좋은 삶으로 바뀝니다.

회개의 관문을 통해 오시는 하늘나라요 주님이십니다.

 

 

 

광야 같은 날씨, 광야 같은 환경의 초겨울입니다.

 

하늘 향해 본질로 서있는 겨울 나목들 역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세례자 요한처럼

무언의 침묵 중에 우리 모두를 향해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하늘나라를 향해, 주님을 향해, 미래를 향해, 죽음을 향해

걸어 나가는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로 육박해 오시는

하늘나라요, 주님이시오, 미래요, 죽음입니다.

 

바로 대림 시기는 오시는 주님을, 하늘나라를 향해

영혼의 등불 환히 켜들고 마음 활짝 열고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나목의 가난한 겨울나무처럼,

온갖 탐욕들 말끔히 비우고 하늘 향해 가슴 활짝 여는 게 회개입니다.

믿음과 사랑 역시 회개(메타노니아)로 시작하여

친교(코이노니아)와 봉사(디아코니아)로 완성됩니다.

빛나는 대림초 두 개가

바로 회개하여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 가난한 회개한 이들 안에 임(臨)하는 하늘나라입니다.

한자 오실 ‘임(臨)’자의 뜻이 참 은혜롭습니다.

대림(待臨), 강림(降臨), 재림(再臨), 왕림(枉臨)

모두 주님 오심을 뜻하는 ‘임(臨)’자가 들어간 말입니다.

부산떨며 주님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마음 활짝 열고,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의 자세로 깨어 준비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회개입니다.

예전 프랑스 출신의 신학교 교수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임재(臨在)라는 뜻이 너무 좋습니다.

  지금 여기 와서(臨) 우리와 함께 계신(在) 하느님 바로 이게 복음입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회개하여 임재하시면서

동시에 오고 계신 주님을 항해 마음 활짝 열고 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림시기 일회성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는 회개여야 합니다.

매일 평생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요 매월 정기적으로 보는 고백성사입니다.

비상한 회개 행위가 아니라 본래의 제자리에 돌아와,

오시는 하느님을 향해 사는 게 바로 회개요,

회개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첫째가 단순 소박하고 겸손한 삶의 열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인적 없는 황량한 장소만 광야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 모두가 영적의미로 광야입니다.

도시의 광야라는 말도 있듯이

많은 이들이 외롭고 쓸쓸한 마음의 광야를 살아갑니다.

바로 여기 이 마음자리가 주님을 만나는 고독과 침묵의 광야입니다.

굳이 눈에 보이는 사막을 찾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두문즉시심산(杜門卽時深山),

문만 닫으면 어디나 곧 깊은 산중의 광야란 말도 있습니다.

이런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과연 단순 소박한 삶을 살았던 무공해의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바로 그의 꾸밈없는 금욕적 풍모와 단순한 생활양식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이었다.’

진정 자연친화적인 자연과 조화된 자연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사람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 수도승 삶의 귀감입니다.

정말 적게 쓰고 적게 먹으며 낭비하지 않고 쓰레기 내지 않고

단순 소박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입니다.

정 약용 선생님도 그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둘을 강조했는데,

바로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라는 근검(勤儉)의 두 글자입니다.

근검에 이어 세례자 요한의 빛나는 덕목은 겸손입니다.

바로 이 겸손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자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참 아름다운 매력적인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몸이다.”

주님을 체험했기에 세례자 요한의 이런 겸손입니다.

우리 역시 회개할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겸손의 열매입니다.

진정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둘째가 평화로운 삶의 열매입니다.

 

오시는 하늘나라를, 주님을, 미래를, 죽음을, 이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서로 받아들이라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서로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서로 간에 평화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이 따르는 받아들임입니까?

이런 평화의 사람들은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무엇을 요구하지도 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받아들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공존공생하기 위해서는

서로 받아들이는 길뿐이 없습니다.

이웃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한계와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이, 인내하게 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언젠가 써놓은 자작 애송시에 대한 어느 분의 평에도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이 시에 대한 그분의 소감입니다.

 

“어찌 가도 가도 멀기만 한 게 하늘뿐이겠습니까?

  사람도 가도 가도 멀기만 합니다. 알 수 없는 게 사람입니다.

  하늘만 아니라 사람도 내 호수 같은 마음에 받아 담는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 담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 때가 되면 확연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말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탐욕으로 한계를 넘어설 때 유린되는 평화입니다.

한계를 받아들여 제자리의 한계에 충실할 때

균형과 조화의 평화로운 삶입니다.

이사야의 평화가 완전히 실현된 하늘나라의 비전이 참 황홀하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유토피아에 대한 무한한 영감의 원천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손을 디밀리라.

  나의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입니까?

이런 말씀을 성경이 아니곤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 받아들여 공존할 때 평화입니다.

이 평화로운 장면에 비춰볼 때

우리의 현 상황은 얼마나 평화가 없는 위태한 상황인지요.

누구나 갈망하는 평화인데,

전쟁이 나면 하루 250만이 죽고 남북 똑같이 공멸한다는데

위정자들은, 사이비 언론들은 왜 공공연히 대책 없이 무책임하게

전쟁을 부추기는지 통탄스럽습니다.

평화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전쟁은 악입니다.

전쟁에 대한 어떤 합리화도 배격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바로 겸손과 평화입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한 이들,

회개하여 주님을 만난 이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평화롭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이사이의 그루터기

예수님 위에 내렸던 똑같은 주님의 영이,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 주님을 경외하는 영이 우리 위에 내립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여 오시는 하늘나라를, 주님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십시오.

 

근검과 겸손의 열매, 평화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중 회개한 우리들을

당신의 겸손과 평화의 사람들로 만들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 이 은총의 대림시기, 이 한반도에 정의가 꽃피게 하소서.

  큰 평화가 영원히 꽃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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