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2 주간 목요일 -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한 번은 수업을 듣는 도중 교수 신부님과 자그마한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처럼,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어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어른들은 다시 젊을 때로 돌아갔으면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있었으면 좋겠고 돈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가지가 채워지면 순간적인 만족을 갖지만 또 다른 행복을 찾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당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필요’에 의한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의 ‘필요’에 의해 창조하셨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닙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사랑이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 없어도 스스로 온전히 만족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네가 ‘필요’해!”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같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필요는 상대를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더’ 사랑하고 싶은 본성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지 나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이기적이지 않은 이유는 바로 나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본성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행복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 당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한 필요성으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불완전하게 되고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이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수님이 설명하시려는 목적은 사람이 더 큰 무엇을 향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 안에 갇혀계시지 않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것이 바로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본성은 이렇게 밖으로 커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만약 남녀가 사랑하게 되었는데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주위 사람들에게 대한 사랑으로 넓혀져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기적이고 곧 소멸될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절대 자신들 안에 갇혀있지 않고 빛과 같이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 교수님 말대로라면 인간이 자신 안에 머물지 않고 만족하지 못하여 열려있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내가 하느님과 또는 남편이나 아내와 하는 사랑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필요’에 의해 만나는 것이고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니게 됩니다. 내가 진정 온전하게 누구를 더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하느님과 또 내가 하고 있는 사랑에 만족하고 있을 때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외로운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란 이름으로 이웃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도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들이 있어야 함은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산대로 갚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들보다 이 세상에서는 큰 인물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도 더 작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오신다.’라며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을 만큼 세례자 요한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부터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큰 성인일지라도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살면서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 사는 분들보다는 클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쨌거나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육체 안에는 죄의 경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이 세상의 육체를 벗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가장 큰 성인들 중 하나로 크게 빛나실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에 완전하게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인해 불완전하게 되어 항상 완전함을 찾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인간을 결합시켜 다시 완전함의 지위를 돌려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만큼 더 완전해지고 죄 이전의 ‘참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에는 죄에 물들지 않은 육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육체를 지니고 살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을 동시에 지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필요로 만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큰 인물인 이유는 사막에서 먹지도 입지도 않고 극기의 생활을 하며 육체의 욕망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죽이는 만큼 이웃을 하느님의 아가페적 사랑과 더욱 가깝게 사랑하게 됩니다. 육체적 욕망, 즉 에로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고 또 그래서 소유하려하지만 아가페적 사랑은 사랑 자체로 만족하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육체적이고 소유하려하고 집착하고 또 나의 필요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사랑을 돌아보고 정화해나가야 하겠습니다.
폭행당하는 하늘나라
정성껏 주는 선물이 그 주는 정성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주는 사람에겐 그것만큼 마음 아픈 일은 없습니다. 선물을 주는 것은 상대를 좋아해서 기뻐하라고 주는 것인데 상대는 그 마음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이 더 마음 아픈 일입니다.
저도 돈 없는 대학생 때 가진 돈을 다 털어 아는 형에게 책갈피를 선물했지만 그 형은 저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었는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제가 주었던 책갈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저는 다시는 그 사람에게 선물을 안 하겠다는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던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한 인물입니다. 즉, 세상에 아담과 하와 이래로 잃었던 행복이 다시 찾아왔다는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인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우리에게 돌려주셨습니다. 하느님나라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하느님 자신이십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 사람을 사랑해야만 행복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 하느님나라가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나라를 선포했지만 그 나라가 모두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한 선물을 선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것을 주는 입장에서는 폭행을 당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세상에 내려오신 하늘나라인 그리스도를 잡아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결국 그들은 하늘나라를 빼앗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선물을 주신 하느님 입장에서는 이것만큼 큰 폭행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 다른 점은, 인간은 선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시는 그 사람에게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반면에, 하느님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기회가 있는 한 끝까지 선물을 권유합니다. 왜냐하면 받는 사람은 선물의 귀중함을 모를지라도 주는 사람은 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이가 우유를 마시지 않으려 할 때 마시면 좋은 것을 알기에 계속 권유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계속 폭행을 당한다고 느끼실지라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계속 권유할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것을 비워야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못하기에,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어느 정도씩은 폭력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고맙게 온전히 받아들일 때 그 주시는 분의 마음은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