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소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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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종원 | 작성일2010-12-10 | 조회수42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예수가 말하는 무소유>
사람은 아무 것도 쥐고 태어나지 않는다. 빈손으로 태어난다. 태어난 존재 자체도, 그 가능성 전체와 더불어 자신을 포함한 존재의 바다에서 그냥 주어진 것 아닐까?
사람은 아무 것도 쥐고 죽지 못한다. 빈손으로 떠난다. 떠나는 존재는 평생 쌓은 업보를 그림자처럼 지고서 자기 원존재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아닐까?
나는 6년 동안 매주 두 시간씩 불교철학 강의를 들었다. 또 6년 동안 매주 두 시간씩 동양철학 강의를 들었다. 서양철학, 신학, 성서학 강의는 숱하게 많이 들었다.
그런데 배운 것을 사그리 까먹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나도 상윤 씨나 상집 씨처럼 머리가 좋았으면 하고 아쉬움이 들 때가 많다.
300조개로 추산하는 별들이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는 우주의 신비, 생명계, 영계의 신비, 인간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신비, (신비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낱말이다.)
예수는 그 신비를 인격화, 위격화하여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그 하느님을 자기 모태(아버지)로 여기지 않았을까?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그 하느님의 자녀요, 한 형제자매, 한 혈육이라는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 하느님이 모든 재화, 각 사람의 소질과 능력, 지적재산, 과학기술을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이 골고루 나누면서 친하게 지내라고 베풀어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모든 것의 주인은 그 하느님이고 인간은 주인이 아니라고, 기본소유권은 천부권리라고, 무제한소유권의 탐욕이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해하면 불교의 무소유와 그리스도교의 무소유는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을까?
고된 노동으로 애써 번역해 놓고도 팔릴 것 같지 않아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신약성경해설(200자 원고지 12,789매) 한 대목을 소개하니, 좀 뜨악해도, 불쌍하게 여겨 한 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마태 19,16-26; 루카 18,18-27) 17절 예수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8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19절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20절 그가 예수님께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절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3절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4절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25절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6절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27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10,17-27: 부자와 위험한 재물” 이제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가운데 하나를 읽게 된다. 사람들은 보통 이 이야기 제목을 ‘부자 젊은이’이라고 붙인다. 그러나 실은 ‘젊은이’라는 표현은 마태오 복음서 이야기에 나온다. 마르코는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말한다. 루가는 그 사람을 ‘어떤 권력가’라고 지칭한다. 이 대목은, 이 부분에 속하는 앞 대목들처럼, 첫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온다. 그래서 그 맥락에서 잃어야 한다. 처음 구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암시한다. 앞 대목들은 풀 수 없는 일부일처제 결혼의 요구, 즉 당시 유다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예수님의 요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옛날 사람들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말씀이었다. 이제 어떤 부자가 예수께 당신을 따르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이 대목에서는 재물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 사람은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자기도 가고 싶어 한다. 그 사람은 아마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이 모든 소유권을 버리는 십자가의 길임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달려온다. 달려온다는 행위는 스승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표현한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 행위는, 흠숭한다는 분명한 의도가 아니라도, 적어도 깊은 존경심을 드러낸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스승으로 인정하면서,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그 말이 단순한 아첨일까? 예수께서는 한 마디로 잘라 말씀하신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해석이 분분하다.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하느님 홀로 선하시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본 당신께 그 선함을 돌리지 않으신다. 온갖 선함은 모든 선함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선하심, 좋으심을 나누어받아야만 선하다고, 좋다고 할 수 있다(창세 1).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모든 것은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도 선하고 좋은 것이다. 모든 것이 좋게 쓰여야 한다는 정확한 목적과 기능을 부여받고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기본 질문을 예수께 던진다.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도 율법 교사가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루카 10,25-37). 예수께서는 그 사람도 이미 알고 있는 답변을 되풀이하여 들려주신다. 왜냐하면 그 사람도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웃에 관한 계명을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십계명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횡령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그렇게 하신 것은 특히 그 사람이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은 약간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런 계명은 어려서부터 모두 지키고 있노라고 예수께 말씀드린다. 그 말을 들은 예수께서는 마음이 움직여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신다. 마르코만이 덧붙이는 그 표현은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부르심이 어떤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드디어 예수께서는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제안을 하신다. 당신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신다.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당신과 똑같은 길을 걷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한 자기 조건을 붙이신다. 먼저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참된 재물을 얻는 길이다. 그때 대화하는 가운데 생겨났던 기쁨이 스러지고 만다. 그 사람은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당신 모험이 실패하자, 더 큰 마음의 고통을 느끼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함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이 십자가의 길로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모든 것을 버리고, 두벌 옷도 챙기지 말고, 신발과 지팡이만 가지고, 헐벗고 굶주리는 상태로 당신을 따라야 함을 알고 계신다. 그것이 떠돌이 선교사의 철저한 가난이다. 선교사인 모든 신자도 그런 철저한 가난을 실천해야 하늘 나라의 재물을 차지할 수 있다. 그 기회를 잡아, 예수께서는 당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라는 새로운 교훈을 주신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놀라운 비교를 내놓으신다. 초세기서부터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구절을 누그러뜨려서 해석하려고 시도해 왔다. 그리스어 ‘카멜론’을 ‘밧줄’을 뜻하는 ‘카밀론’으로 바꾸어 가지고 그렇게 하려고 했다. 즉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일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밧줄* 위를 걸어가는 것이 더 쉽다는 식으로 알아들으면 인정하기가 *한결 *나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어떤 저술가는, 앞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강도(剛度)를 누그러뜨리는 해석을 내놓았다. 즉 ‘바늘’이라고 부르는 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문이 얼마나 좁든지 낙타들은 그 문을 통과하여 도시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문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당신 언어의 특징과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하신 그 말씀을 충격을 주어 생각을 하게 하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주님께서는 어중간한 말씀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제자들은 심각해져서 자기들도 크고 작은 재물, 내적 외적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고 수군거린다.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하다고 부드럽게 대답하신다. 하느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당황하는 사라에게 하느님이 해 주신 말씀을 상기시킨다(18,14).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예수께 대한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을 상기시킨다(루카 1,37). 이미 늙은 여자가 아기를 낳는 일, 동정녀가 남자의 개입이 없이 아들을 낳는 일은 사람들 눈에 불가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일을 해내실 수 있다. 그와 똑같은 모양으로, 아버지께서 자비롭게 개입하여 힘을 주시면, 모든 재물을 버릴 수 있다. 즉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자기 소질과 능력까지 모두 하느님의 소유이고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인이심을 인정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모든 것을 모든 사람・온 인류와 따뜻하게 나누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묵상
1. 예수님을 따르는 길 이 본문(10,17-31)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유효하다. 그러나 특히 성직자와 수도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렇다. 부자 이야기는 부르심 또는 소명을 다루는 본문의 문학유형에 속한다. 첫 제자들(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라고 부르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부유한 그 사람은 매우 신중한 것처럼 보인다.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받고 싶어 한다. 예수께서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새로운 순서에 맞추어 십계명을 상기시키신다. 아마 예수께서는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서 계명의 순서를 다시 정하신 것 같다.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 안에서는 흔히 폭력과 살인이 결합된다. 그 다음에는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에 대하여 말하고, 거기에다 “횡령해서는 안 된다.”라는 도둑질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신다. 넷째 계명은 마지막에 나온다. 이 계명은 ‘코르반’이라고 선언한 봉헌물, 즉 ‘거룩한 봉헌물’, 어떤 스승들이 가르치는 대로, 부모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으려고 선언한 그 봉헌물에 대하여 말하는 7,10-11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일까? 예수께서는 하느님만이 선하심을 상기시키면서 말씀을 시작하신다. 이 주장은 신명 6,4를 상기시킨다. 그 구절에는 율법의 주요한 계명이 나와 있다. 성경 전체와 사람의 행위는 그 주요 계명에 비추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해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한사코 더 나아지려는 우리 염원의 주요 동기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은 영적 생활에서 성장하려는 진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한편, 자기는 계명을 착실히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길을 물을 수 있는 스승을 만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참된 스승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자기에게 너무 지나친 포기를 요구하신다고 생각한다. 그 포기는 철저한 회개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자기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음을 절감한다. 이 모든 이야기의 첫째 귀결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자면 딴 뜻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 또는 문화적 이익이나 영예를 추구하면서 하느님과 당신 나라를 위하여 몸 바친다고 우기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와 박해를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철저하게 깨끗해지기를 요구한다. 우리에게 원래부터 소유권이 없음을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그런 근본적인 가난의 정신을 요구한다. 이 세상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고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예수께서 바라보시면 우리가 변한다. 대사제의 관저 마당에서 예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시자, 그는 뉘우치고 통곡한다. 예수님의 시선은 사랑이 담겨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반영하는 사랑이 담겨 있다.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가 원래 가난함을 기억하게 한다. 재물보다 하느님을, 당신을 사랑하게 해 준다. 그 부자는 예수님의 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다. 많은 재산을 버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재물이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소유에 매인 사람은 예수님의 시선을 마주할 수 없다.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그 시선을 받아 회개할 수 있다.
2. 부(富)와 가난 부르심을 받은 그 사람은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처음에는 재물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살아 있고 효과를 거두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생각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 참된 보물을 찾는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하느님의 나라에 있지 않고 자기 재물에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놀란 제자들의 눈앞에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오늘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위해주는 선택’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고, 그들 가운데 그들과 똑같이 가난한 사람이 되지 않은 채,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고서는, 그들과 공동운명체가 되지 않고서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사명과 임무는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는 데 있었다(루카 4,16). 떠돌이 생활을 하시는 예수님의 존재이유는 목자 없는 양떼처럼 굶주리는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정신병환자들)을 낫게 하는 데 있었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고 운명을 함께 하셨다. 당신처럼 살겠다는 사람들도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
3. 오늘날의 재물 오늘날의 재물은 꼭 ‘물건’만이 아니다. 지적 능력, 전문지식, 예술재능, 뛰어난 체육 기능, 과학기술 등도 재물에 속한다. 영예, 명성, 명예 등도 재물에 속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다. 그 모든 것은 모든 사람과 온 인류를 위하여 사용하라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간결하게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고 단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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