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대림 제3주일 2010년 12월 12일). | |||
---|---|---|---|---|
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0-12-10 | 조회수49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대림 제3주일 2010년 12월 12일
마태 11, 2-1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요한과 예수님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예수님의 길을 닦아 놓기 위해 파견 된 인물이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이런 극찬의 말씀 끝에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려는 복음서의 의도가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과연 오실 그 메시아인가 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이라고 이사야서(29,18-19; 35,5-6; 61,1)가 말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회상하면서 찾아낸 이사야서의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불행과 악을 퇴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초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면, 그것은 동화(童話)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의 위력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동화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연 질서 안에 세상을 창조해놓고, 몇 사람에게 기적의 능력을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벌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자주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로 계신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을 고쳤다는 말은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다.”(루가 17, 21)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사람들은 불행과 악을 퇴치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심 없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생을 바쳐서 일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관대하지만,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먼저 대가(代價)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무상(無償)으로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총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대가없이 베푸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우리 노력의 대가로 만들고자 합니다. 지키고 바쳐서 얻어내는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질서에 익숙한 우리는 하느님까지 그 질서 안에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우리는 지키고 바친 만큼 받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 신부이면서 샹송 가수로 유명한 분이 있었습니다. 바쁜 연주 일정과 심한 불면증 때문에 술을 가까이 했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여곡절 끝에 신부로서 또 인기 가수로서 자존심을 접고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독에서 헤어나자 다른 중독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중독자 한 사람을 자기 방에 데려다 사흘 동안 함께 머물면서 자기의 경험을 그에게 들려주며 회유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 중독자가 중독자 모임에 나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그는 그 중독자를 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혼자 말합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입니다. 인류가 범하는 죄에 내던져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나라는 이 인간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는 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말은 물론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술을 끊은 알코올중독자에게도 조금은 적용되는 말입니다.”(뒤발, ‘달과 놀던 아이’, 141). 알코올중독이라는 불행을 퇴치하는 노력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력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