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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리와 성경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1 조회수773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2 주간 토요일 - 영적 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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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20대 초반 여성은 잘 노는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여성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 여성은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

반면에 20대 초반 남성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중반 남성도 역시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20대 후반이 되어도 예쁜 여자를 좋아한다.

정말 남성들은 시각에 민감한 것 같습니다. 제가 버스에서 어떤 한국 자매에게 천주교에 대해 설명해주자 저와 함께 탔던 후배 신부가 “형은 대단하다. 난 저렇게 생긴 여자라면 말 안 걸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저렇게 태어난 게 저 사람 잘못이냐? 껍데기를 보지 말고 영혼을 좀 봐라.”라도 대답했지만, 사실 저도 남잔데 예쁜 여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육체의 눈을 감고 영적인 눈으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였음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메시아가 오기 전에 그의 길을 닦기 위해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오기로 되어있었는데 세례자 요한이 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왔다면 누구나 다 알아보았겠지만 세례자 요한을 누가 엘리야로 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혹시 우리가 그 당시에 살았더라도 세례자 요한을 오시기로 되어있던 엘리야로 알아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다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영적인 눈으로 본다면 두 분은 결국 같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예언자들과 갈멜 산에서 대결을 합니다. 각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고 그 위에 송아지를 잡아 제물로 놓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제물을 사르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사백오십 명이나 되었고 야훼를 섬기는 예언자는 엘리야 하나뿐이었습니다. 먼저 바알을 섬기는 예언자들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소리소리 질러보지만 하늘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윽고 엘리야의 차례가 되자 그는 제물에다 물을 부으라고 합니다. 네 동이씩 세 번을 붓게 만듭니다. 그 물이 제단 주위 도랑까지 가득 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있던 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태웠습니다.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제단과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하며 물은 세례를 상징하고 불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상에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희생을 ‘내가 받을 세례가 따로 있다’하시며 바로 ‘세례’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골고타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대로 일어납니다. 세례는 옛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성령님이 내려오실 제단이 없었는데 유일하게 (물론 성모님을 제외하고) 예수님께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그분 위로 (불 대신)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실 갈멜산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현대에 이런 일이 파티마에서 일어났습니다.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태양이 땅으로 떨어지듯 내려오더니 모든 것을 말라버리게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간엔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 대신 이번엔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오순절 때 성모님과 사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성령님이 내려오셨던 것의 재현인 것입니다.

 

성탄트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또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 상징한다는 것을 듣지 않았다면 우리가 성탄트리를 그리스도의 육체로, 또 영원히 살게 하는 그분의 살과 피로 볼 수 있었을까요?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장님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이런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 몇이 이 말씀을 듣고 ‘그러면 우리들도 눈이 멀었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9,40-41)

 

엘리야는 하느님의 오심을 위해서 세상의 우상을 쓸어버렸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해서 죄의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리야도 세례자 요한도 또 그가 증언한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하고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육체의 눈으로만 보려고 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성령님으로 바오로에게서처럼 눈에 비늘이 떨어져나가 온전히 영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처럼 우리 눈도 뜨게 해 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의 눈을 감고 영적인 눈으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육체의 삶을 버리고 영적인 삶을 살기를 결심해야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교리와 성경

 

어떤 사람들은 천주교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만 성경해석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마음대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자의 마음 안에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며 성경을 통하여 주시는 메시지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천주교에서는 베드로 서간의 말씀을 따라서 어떠한 성경 해석도 자의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자유해석이란 말은 각자가 온전하여 하느님의 진리들을 개인들이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교만입니다.

김해숙씨와 최진희씨가 주연한 ‘친정엄마’란 영화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즉, 최진희는 어린 아이였을 때 글도 잘 쓰고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란 곳은 매우 시골이었습니다. 그의 재능을 본 마을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참 글도 잘 쓰고 잘 읽고 똑똑하네. 커서 버스 안내양 하면 좋겠다.”

그 마을 사람들의 수준에서는 버스 안내양이 가장 똑똑해 보였나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 사고 수준에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돼지 눈에는 사람도 돼지로밖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을 돼지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돼지와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돼지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하느님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각 개인이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전에 오시기로 예언되어 있던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것을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오늘 제 1독서에 예언된 대로 아직도 엘리야가 먼저 오기를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아직도 엘리야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전한 해석을 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애편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쓴 사람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뿐입니다. 아무리 유치하기 그지없는 내용도 사랑하는 두 사람 안에서는 서로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성령님의 감도로 쓰여졌습니다. 성령님은 사랑이십니다. 즉,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만이 그 온전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령님으로 성경을 보려고 했다면 성경에 계시된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엠마우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설명해 주시며 메시아가 수난하고 죽고 부활해야 함을 한참동안 설명해 주셨어야 했습니다.

성령의 감도로 쓰여진 성경은 그래서 성령을 충만히 받은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만이 온전히 해석할 수 있지, 나머지는 자신들의 부족함 때문에 부족하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불어넣어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고유한 권한이고 그 고유한 권한은 성령님의 권위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즉, 성령강림 때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그리스도의 성령님을 충만히 내려 주시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권한뿐만 아니라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도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성경을 해석한 내용들이 바로 교회의 가르침이기도 하고 믿을 교리들이기도 합니다. 성경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석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리를 잘 알아야 그 안에서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개인적으로만 해석하려한다면 갈라진 교회들처럼 각자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며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하나이시듯이 성경의 해석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교리를 잘 이해하게 되면 성경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도, 승천도 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지도 다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성모님이 은총이 가득하시다고 가브리엘 천사가 인사한 것도 무슨 뜻인지 깨닫지를 못하게 됩니다.

성서학자들도 문자로부터 해석을 시작해야 객관적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하며, 교회의 가르침을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문자는 죽이고 영은 살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성령으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후에 성경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합시다.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성경을 보면 안 보이던 것들도 보이고 모든 것을 잘 해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지 성경을 쓰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앞서는 것입니다.

 

 

 
< 나의 하느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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