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1 조회수830 추천수16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0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Mt.17.11-12)
 
 
제1독서 집회서 48,1-4.9-11
복음 마태오 17,10-13
 
전에 어떤 형제님께서 제 차에 이상한 것을 하나 달아주셨습니다. ‘블랙박스’라는 것인데요. 원래는 비행기에 장착되어 있는 것으로, 사고가 났을 때 원인을 밝혀내는 장비입니다. 그런데 이 블랙박스가 차량용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즉, 사고가 났을 때의 찍은 영상을 통해 잘잘못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답니다. 그래서 이 조그마한 블랙박스에서는 약간의 충격이 생기면 곧바로 영상을 녹화합니다.

이 블랙박스를 장착한 뒤 몇 달이 지났습니다. 문득 어떻게 영상이 찍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 동안 단 한 번도 확인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 블랙박스 안의 메모리 카드를 빼서 컴퓨터로 확인하는데, 마침 이 자리에는 제가 몸담고 있는 부서 직원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상을 보는 순간, 그 직원이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모텔에는 왜 가셨어요? 어… 수상한데요?”

찍힌 영상으로 보이는 부분이 모텔입니다. 제가 봐도 이상한 생각이 들 것 같았습니다. 화면에 보이는 영상은 모텔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모텔에 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참을 생각했지요. 그리고 당시 교구청 신부님들과 회식을 했던 장소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회식 장소의 맞은편에 모텔이 있었고, 제가 주차한 곳이 바로 모텔을 마주보고 있는 주차장이었던 것입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제대로 알아서 서로간의 오해를 풀기위한 블랙박스가 오히려 오해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오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그러한 오해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항상 옳고, 남은 항상 틀리다는 생각. 그래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된 잘못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꾸짖고 있는 율법학자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미리 준비한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지요. 바로 자기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기심과 욕심은 참 구세주이신 예수님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엄청난 죄를 범하게 만들지요.

멀쩡한 몸으로 구걸하는 걸인을 본 지나가던 점잖은 형제님께서 꾸짖습니다.

“아니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구걸하면 어떻게 하는가?”

그러자 걸인이 도끼눈을 뜨며 따지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구걸 좀 하려고 사지를 잘라내란 말이오?”

그 형제님께서 꾸짖는 이유는 멀쩡한 몸을 가지고 있으니 열심히 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걸인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따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과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갖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참 신앙인입니다.

 

누구나 큰 것만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피천득).



 

칭찬의 힘(김점선, ‘점선뎐’ 중에서)

미술 시간에 석고 데생을 하던 친구가 지우고 또 지우더니 결국 스케치북을 부욱 찢었다. 나는 보이는 대로 편안히 그리는데 친구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려줄까?”하고 물으니 친구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어렵지 않게 그려 주었다. 그 뒤에도 주변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이 그림 그리기를 고통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왜 나는 그들과 다른가?

내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버지 덕택이다. 처음 그림을 그린 것은 다섯 살 때로 기억된다. 전쟁 중 피난지인 마산에서 나는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올라 아버지 옆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래로 보이는 피난촌의 천막집들을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산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말없이 상상화를 그리는 동안 아버지는 그냥 바라보고만 계셨다.

조금 더 자라서 집에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나를 불러 그들을 그리게 했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아버지는 “똑같지! 사진이야!”하며 나를 칭찬하는 것도 모자라 모든 손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 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지만 그러한 말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탄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림 그리는 일을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어떤 그림은 완성하기까지 3년이 걸렸지만 안타까웠을 뿐 고통받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칭찬이 그림 그리기를 편안한 작업으로 만든 것이다. 끊임없는 칭찬이 세상 속에서 어지간한 일에도 끄떡도 하지 않게 하는 기초가 되어 주었다.

 
 
 
 
 Comme Ce Jour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