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축복의 선물" - 12.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1 조회수371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11 토요일 황 춘흥 다미아노 신부님(1926-2010)을 위한 장례미사

욥기19,1.25-27ㄱ 요한6,37-40

 

 

 

 

"축복의 선물"

 

 

 

아름다운 선종을 맞이한 형제의 죽음보다

공동체에 큰 축복의 선물은 없습니다.

이런 선종을 통해 우리는 좋으신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위령성무 일도 시 시편 구절이

어제 선종하신 우리 존경하는 수도 선배

황 춘흥 다미아노 신부님의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주 하느님이 그의 구원이신 자, 그의 희망 주 하느님이신 이는 복되도다.”

 

이렇게 살아야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84세까지 알렐루야의 삶을 사시다가 아멘의 순종으로 삶을 마감하신

황 다미아노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의 삶은 ‘한결같음’과 ‘항구함’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수도승다운 삶을 사신 분이셨습니다.

제가 1982년 34세의 늦은 나이로 수도원에 입회하여

신부님 밑에서 3년간 신학원 생활을 할 때

신부님의 자상한 배려도 잊지 못합니다.

밖으로는 과묵하시고 날카로운 분위기였지만

안으로는 한없이 자상하시고 친절하신 분이셨습니다.

수도원 적응에, 또 만학으로 인해 어색하고 낯설어 하는 저에게

“프란치스코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격려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독어 해석이 막힐 때 집무실을 찾으면

언제든 큰 형님 같이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해석보다도 그 따뜻한 분위기가 좋아 찾았던 적도 종종 있습니다.

이후 매해 저의 영명축일 때는 맨 먼저 축하전화를 주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언젠가 토요일 오전의 일과도 생각납니다.

부활을 앞두고 신학원생들이 모두 오전 내내 정원을 정리했습니다.

저는 자주 호기심에 신부님 집무실 창문을 봤습니다만

신부님은 놀랍게도 오전 내내 창밖을 내다보지 않은 채

미동도 없이 공부에 열중하셨습니다.

80세가 넘어 노구의 불편한 몸에도

늘 공부하셨던 책과 필기구가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참 놀랍도록 부지런하고 성실하셨던,

늘 제자리의 정주생활에 충실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신부님처럼 적절한 어휘 구사에

핵심을 집어내는 간결 담백한 강의나 강론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듣고 난 여운은 늘 깊고 그윽했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후 신부님의 수도여정은 서울 신학원을 거쳐,

‘약목본당-마산트라피스트 수녀원지도신부-대구신학원-본원 요양-선종’

까지 이른 지극히 평범한, 언제나 그 자리에서

수도승으로서 한결같고 항구한 삶이셨습니다.

늘 그렇게 사시다가 그렇게 돌아가셨고 우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부 분도성인의 말씀대로

날마다 눈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그 삶의 자리에 충실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언젠가 갑자가 선종의 죽음은 없습니다.

하여 우리는 끝기도 때마다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무수히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빌어주소서.’ 성모송을 바치며

죽음을 준비하며, 수도서원 수시페를 자주 생각하며 수도승 삶을 점검합니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그러면 내가 살겠나이다.

  주는 나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바로 죽음을 통해 수시페의 완성이요 신부님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마지막 봉헌이자 순종의 죽음을 통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난과 순종의 본질로 들어나는 수도승 삶이요 이의 절정이 바로 죽음입니다.

삶은 순종이고 마지막 순종이 죽음입니다.

일상의 작고 큰일을 잘 받아들여 순종할 때 마지막 순종의 복된 선종입니다.

 

삶과 죽음은 둘이자 하나입니다.

마치 새의 양 날개처럼 우리 역시 삶과 죽음의 양 날개로

세상 창공을 날며 살아갑니다.

삶 곁에 늘 도반처럼 있는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늘 깨어 있을 때

균형 잡힌 삶에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어둔 밤이 끝이 아니고 새 아침의 시작이듯,

겨울이 끝이 아니고 생명의 봄의 시작이듯 말입니다.

하여 우리는 죽음 넘어 영원한 생명을 내다보기에,

또 여기서 그 생명을 살기에 희망 찬 삶을 삽니다.

죽음의 고통 중에도 구원자께 희망을 둔 욥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오신 황 신부님이요,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분을 보리라.”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백절불굴의 삶입니다.

매일 하느님을 뵈오며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우리 모두를 희망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주님은 이 미사 중 황 신부님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은혜로운 약속 말씀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