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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례자 요한의 완전한 사랑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2 조회수872 추천수15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 3 주일 - 세례자 요한의 완전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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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눈물이란 MBC 다큐를 보았습니다. 이번에 나온 부족들은 에티오피아에 살면서도 에티오피아란 것이 무엇인 줄 모르는 순박한 이들입니다. 이번엔 성인식을 앞둔 다르게란 청년이 집중 조명 되었습니다. 그 부족은 동생이 형보다 먼저 결혼하는 일은 없어야하고, 또 결혼을 하지 못하면 집을 가질 수 없어, 비가와도 비를 맞으면서 밖에서 자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관문은 성인식을 치러야 결혼할 권리를 얻게 되는데, 만약 실패하면 함께 성인식 한 사람들이 다 결혼할 때까지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다르게라는 노총각은 형들이 많고 또 자신의 형 중 한 명의 아내가 사고로 죽자 형이 재혼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노총각이 되어버린 다르게는 남들보다 몸이 약해 보여, 소를 몇 번 연속해서 뛰어넘어야 통과하는 성인식 앞에서 매우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4년 동안 몰래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자도 성인식을 가슴조리며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앞의 여섯 명이 다 뛰어넘었지만 다르게는 첫 번째 뛰어넘다가 거의 넘어질 뻔했습니다. 어깨가 땅에 닿으면 탈락이었지만 다행히 손만 짚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결혼하여 집을 짓고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고도 2달 동안은 함께 잠자리를 할 수 없습니다. 혼전 순결을 중요시 하여 여자가 정상적인 주기를 하는 전통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법에서도 결혼을 하고 함께 부부관계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 혼인이 완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부부관계를 맺기 전까지 혼인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무튼 성인식까지 치루고 다르게의 눈시울이 젖어올 때 저의 눈시울도 함께 젖어왔습니다. 저야 결혼해보지는 않았지만, 둘이 함께 살게 되기까지도 참 멀고 먼 길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결혼이 또한 사랑의 완성이 아닙니다. 사랑의 완성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며 그분께서 정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분인지 확인하고 오라고합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께 오지 않고 요한에게 매달려 있는 제자들에게 “나를 보면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모르겠느냐?”하며 호통 치시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은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의 겉모습도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보면서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기꾼이나 심지어는 마귀라고까지 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외모보다는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은 실체를 꿰뚫어보기에는 너무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계속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질책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어떤 사람들은 미사에 와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 속에서 헤매다가 혹은 주위에 보이는 것만 보고 집에 돌아갑니다. 고운 옷?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와서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돈 많이 벌고 집안이 안녕 하는 등의 다른 것을 바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원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더 원하여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부터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지목한 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기적을 보아야 믿는 수준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회개시켜 예수님께서 오시기에 알맞은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사명을 띠고 온 인물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그리스도께 보낸 이유는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께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그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그에게 있는 몇 명도 모두 그리스도께 보내어 그 분의 제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 그것은 곧 사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뽑고 마지막엔 그들에게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예식을 하시고 부활하셔서는 성령님을 부어주십니다. 가르침을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신이 지닌 모든 것을 주는 첫 번째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곧바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위대한 스승으로 삼고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약 60조개의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이 세포들이 인간 수명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이 세포들은 하루에도 4억 개 이상씩 죽고 다시 생겨나곤 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은 세포가 노화해 죽기 때문에 단 몇 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어렸을 때 우리를 구성하고 있었던 세포는 지금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세포로 구성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꾸 변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미 죽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그 세포로 구성된 육체를 보면서입니다. 외적인 모습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자에게 그 경향이 더 강한데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그 요구 때문에라도 예뻐지려는 본능이 있고 그래서 화장을 하고 심지어는 성형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가 변해도 영혼은 그대로입니다. 본질을 사랑하지 않으면 배우자의 육체적인 면이 아름다움을 잃어갈 때 사랑도 동시에 잃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영원하려면 영원한 것을 사랑하면 됩니다. 변화하는 것을 사랑하면 그 사랑은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하늘을 원망하고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은 예수님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오는 축복들만 바랐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깊이가 없어지는 것, 또 사랑이 짧게 끝나버리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눈이 오염되어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것에 더 애정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자꾸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도 단발에 끝나고 맙니다.

연구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인 느낌은 1년이면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항상 위기가 기회이듯이 그 위기를 통해 그 사람의 더 깊은 면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우리가 만들어왔던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예수님이 우리 안에 태어나셔도 예수님은 바라보지 않고 갈대나 좋은 옷 입은 사람들만 바라보며 참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 가나안 땅까지 가야 완성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세례 받을 때의 믿음만이 아니라 더 완성된 믿음으로 향해야 함을 강요받고 있는 것처럼, 사랑을 할 때도 그 사랑이 깊어지고 성숙해지도록 이미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의 제자들을 사랑하고 또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끊임없이 그분께 보냈습니다. 사랑을 보내는 것은 어쩌면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영원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사랑의 가장 완전한 깊이요 완성입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향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이 누구를 향하게 하고 사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그대를 향한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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