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 주간 월요일 - 게임을 즐기려면 룰을 먼저 알아라
가끔은 저를 좋아하는 신자 분들이 생깁니다. 남자 분들도 있지만 여자 신자 분들이 신부라고 해서 더 좋아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 사랑하는 것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미움이나 무관심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정이 깊어지다 보면 자칫 결혼해야 할 사람이 결혼은 하려하지 않고 사제만 좋아하게 될 수도 있고, 또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남편보다 사제를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사제는 모든 이의 아버지이고 또 교회의 신랑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모든 신자들의 애인도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사제는 “모든” 이의 사제이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의 사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더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한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아이를 다 사랑해야 하는 것처럼 사제도 편애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첫 번째로 사랑해야 할 남편보다 사제를 더 사랑하게 된다면 사실은 그것도 사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은 신자도 알고 사제도 아는 일이지만 성당 내에서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각자 살면서 지켜야 하는 룰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계신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와서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서는 학위가 필요하듯이 그들도 그런 권한을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학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분의 권한은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상의합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한다면 왜 요한의 말을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한다면 백성들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갖은 비난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왔듯이 당신이 가르치실 권한도 하늘에서 왔다고 말씀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겠소.”라고 대답하자 예수님도 “그럼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룰을 지키고 있지 않고 ‘억지’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해 보아야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을 설득시킬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단절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동네에서 축구를 할 때면 시간을 정해놓고 하지를 않습니다. 축구를 하다보면 어느 정도 승패가 갈리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은 상대를 이길 수 없는 점수 차가 나게 되면 한 아이가 반칙을 많이 하기 시작합니다. 공을 손으로 잡고 사람을 잡기도 하며 축구의 룰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면 축구는 럭비로 변합니다. 처음 몇 분은 그렇게 공을 들고 뛰는 것도 재밌지만 5분도 안 되어서 경기는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왜냐하면 룰이 없는 것이 재밌게 느껴지는 것은 경기를 이길 수 없어서 처음에 반칙을 하기 시작한 사람뿐이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경기를 재밌게 하라고 있는 것이지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데 룰을 어기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여러 사람이 그 경기에 흥미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반드시 규칙이 생깁니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하느님과의 사이에서 지켜야하는 무엇이 있습니다. 오늘 수석 사제들은 자신들이 모순에 빠져있음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예수님을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더 이상 상대를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지켜야하는 룰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고집만 부린다면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인간관계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면 어쩌면 내가 보이지 않는 규칙들을 깨고 있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 관계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하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몸소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룰입니다. 그 룰 안에서만 인간은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멋진 경기를 위해 먼저 룰을 숙지합시다. 멋진 삶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법을 배웁시다.
관계와 핑계
제가 인간관계 안에서 자주 듣는 부정적인 말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저보고 너무 연락을 안 한다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자신들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서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을 잘 하지 않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저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마음을 모두 열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마음을 열지 않고 감추는 것이 많아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저는 별로 감추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만약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직은 상대방과 온전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이지 일부러 담을 쳐 놓고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도 변함없이 좋아하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상대와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 이유가 상대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대부분 상대가 어째서, 상대가 저째서 관계 맺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들은 우리가 어째서, 저째서를 따지기 이전에 이미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상대를 판단하면서 관계 맺기 어렵다고 말할 때 사실은 관계를 맺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수 있습니다.
‘친정엄마’라는 영화에서 김해숙씨가 딸을 위해 점을 보고 와서 고해성사 하는 모습이 재미있게 나옵니다.
“저기 신부님, 나 죄를 지었구먼요.”
“또 점집 가셨어요?”
“아따, 신부님이 이제 점쟁이 다 돼부렀오이~”
“아녜스 자매님, 점집에 안 가기로 하셨잖아요.”
“야~ 나가 약속은 그렇기 했는디~ 자식 일이 그러다본께... 아따 성모님도 예수님 아들 두셨으니까 내 맘 잘 아실 것이오.”
“천주님하고 하신 약속 지키셔야죠. 아무리 자식 일이 걸려도 그렇지 그러시다가 구원 못 받으시고 지옥가시면 어쩌시려고요.”
“자식 키우다보면 자식 일보다 더 중한 것은 없어요. 나가 지옥 불 떨어지는 것이 무섭다고 자식 일을 소홀히 하는 부모는 이 세상 천지에 없을 것이요. 아 신부님도 자식이... 아참 신부님은 자식이 없재 이~ 그러니 애비 마음을 모르것구만, 그러니 그런 소리 하시죠. 애비 마음을 알면 그런 소리 못하쟤, 암~ 나 가야것네... ”
어머니의 사랑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자식이 잘났건 못났건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자녀인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잘못해도 우리를 자녀로 사랑해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에 비추어보면 이것저것 상대방의 흠을 찾아내서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대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서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신 예수님께 다가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들은 실상 권한을 물어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는 이들입니다. 그들이 권한에 대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정당한 핑계를 하나 더 추가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 질문이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 아시고 요한의 권위는 하늘에서 오는 것인지 땅에서 오는 것인지 물어보십니다. 물론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말해 봐야 소용도 없고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대답이 아닌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그들은 예전과 똑 같이 예수님을 싫어할 것입니다. 권한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사랑할 마음이 없는 것이 더 큰 진실입니다.
어쩌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상대의 잘못 때문이라고 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사랑이 부족함을 정당화하려고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봅시다. 성모님은 착한 자녀들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항상 부족하기만 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기를 원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