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암초효과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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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10-12-13 | 조회수37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암초효과 - 윤경재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마태 21,23-27)
심리학자들의 연구에서 보통 사람도 하루에 수십 번씩 거짓된 언행을 한다고 나타났습니다. 노골적으로 꾸며대는 조작을 하지는 않지만, 자기에게 불리한 내용을 은폐하는 것도 거짓말에 속합니다. 사람은 늘 약간씩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은폐와 조작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이 100% 진실을 말할 수도 없지만, 100% 거짓을 조작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정보를 주고 싶어 한다.’는 본능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일단 어떤 질문을 받으면 자기가 아는 바를 가능한 한 모두 설명하고 싶어집니다. 이때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은 내용을 감추어야 안전하겠는데, 밝히고 싶은 본능과 안전해야 한다는 본능이 상충하여 회피와 은폐와 조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진술을 예리하게 분석해보면 은폐와 조작을 어느 정도 밝힐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기법을 ‘진술분석’이라고 부릅니다. 범죄인을 수사하거나 법정 진술의 진위를 가려내는 데 유용하게 사용된답니다. 거짓된 진술의 특징은 진술이 물처럼 흐르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지점에 가서는 살짝 주저함과 모순점이 나타납니다. 진술자가 순순히 말할 수 없는 정보가 나타나면 순간적으로 말실수, 머뭇거림, 말 늘어짐, 호칭 등 단어의 변화, 불필요한 어구 사용, 동어반복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특정 정보 근처에서 미묘한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암초효과’라고 부릅니다. 잘 흐르던 물줄기가 돌에 걸려 흐름을 바꾸는 것을 본땄습니다. 경험 많고 노련한 수사관은 그런 순간을 찾아내서 합리적이고 타당한 추궁을 합니다. 그래서 진술자 스스로 모순점을 깨달아 무너지게 만듭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가르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느냐고 따져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조건을 붙여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그들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정보를 밝혀야 하는 본능과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암초효과에 걸려든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그들이 택한 답은 ‘모르겠다.’라는 진술이었습니다. 암초효과에 걸려 그들이 선택한 수단은 ‘회피와 은폐’입니다.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중적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지위와 권한에 손상이 갈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자신의 권한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권한은 자신이 노력한 공로로 하느님께서 주셨다고 확신했는데 그만,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들먹거리며 예수를 직접 만나보고 논쟁을 벌여 자기들 수하에 끌어들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자기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라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봐 한몫 떼어줄 요량이었습니다. 힘깨나 있어 보이는 사람과 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보다 자기편에 흡수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위선적 태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의 위신과 권위를 앞세워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줄 좋은 기회라고 여기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고 언급하신 이유도 헛된 것에 매달려 높은 데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실패를 인정하며 아래로 내려오는 용기를 보이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아래로 내려오는 일입니다. 성공에 길든 사람일수록 실패를 두려워합니다. 오르막 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크게 성공했다고 자만에 빠진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대중에게 높은 인기나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이 이런 공포감에 쉽게 빠진다고 합니다. 인기나 권력이 물거품과 같은 것임에도 정상에서 내려온다는 자체가 실패와 굴욕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려고 애씁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충정어린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겸손하게 스스로 아래로 내려오지 못한 자는 암초에 걸리듯 스스로 모순에 휩싸여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 섭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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