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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대림 제4주일 2010년 12월 19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7 조회수410 추천수7 반대(0) 신고

대림 제4주일        2010년 12월 19일. 


마태 1, 18-24.


오늘 복음은 마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갖게 된 그들의 신앙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한 사이인데, 두 사람이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수사기관의 기록도 아니고, 역사학적으로 고증(考證)된 사실도 아닙니다. 복음은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는 구약성서 이사야서(7, 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서는 히브리어 단어 임마누엘을 그 시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라고 설명까지 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을 진실이라고 믿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처녀인데 예수를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신앙이 아닙니다. ‘동정녀’ 혹은 ‘처녀’라는 말은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발생한 단어입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 히브리어 구약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때 번역하는 사람들이 히브리어 원본의 ‘젊은 여인’이라는 단어를 그리스어로 ‘처녀’라는 단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는 그 그리스어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하여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갖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과의 연대성 안에서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그 연대성을 철저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그 연대성을 배워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은 인류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그분의 전능하신 힘에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불쌍히 여김’, ‘가엾이 여김’, ‘측은히 여김’을 보고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에 동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버린 사람들, 경건하지 못하다고 외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천한 사람들을 가엾이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그런 행위들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당신도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 과연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그분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정직한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강한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과 친분을 갖는 것은 물질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활 방식입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삶은 그런 우리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위대하고, 강하고, 많이 가진 생명이라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베풀어주신 생명이라서 그것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서 그분과의 연대성 안에서 살겠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입니다. 그 연대성은 우리 주변의 어떤 인간 생명도 버리거나 외면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생명을 하느님과의 연대성 안에서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성탄은 그런 삶이 이 세상에 출현한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은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하느님이 하신 새로운 일이었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을 담아 전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삶 안에 함께 계셨고, 그 삶을 배워 실천하는 우리들 안에도 하느님은 살아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권력의 화려함에 심취한 나머지, 허장성세(虛張聲勢) 거품을 쫓는 인간의 삶 안에는 물질과 권력은 있어도,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권위라는 허세도 없이, 훌륭함이라는 허풍도 없이, 약자의 초라함과 서민의 애환을 당신 것으로 하면서 인류역사 안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면서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사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과 같은 연대성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막강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휘두르는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싸워서 이긴 사람은 하느님이 자기편에 계셔서 이겼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재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은 사람은 하느님은 높은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강하고, 이기고, 재물을 주는 높은 분이라야 했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상상하며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친 하느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을 버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던 하느님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강하고, 승리하고, 재물과 권력을 주는 분이라 고집하던 사람들의 위협 앞에 예수님은 맞섰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분을 처형한 사람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달아놓고 내려오는 기적을 해 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시라고 하느님에게 기도하면서 죽어 가셨습니다. 하느님은 강자도 아니고, 승리자와 함께 계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실천한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느님은 심판하고 다스리는 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또 사람들의 불행과 고통을 퇴치하기 위해 봉사하는 우리의 노력들 안에, 그 노력의 원천으로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성탄이 다가왔습니다. 옛날 베들레헴의 구유에 탄생하셨던 그 생명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도록 기도합시다. 불쌍히 여기고, 이웃을 돌보아주며 섬기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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