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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 12.17,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17 조회수302 추천수4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17 대림 제3주간 금요일

창세49,1-2.8-10 마태1,1-17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얼마 전 어느 자매의 배우자에 대한 비판이 생각납니다.

 

“무엇인가 향하는 데가 없습니다.

  목표도 비전도 꿈도 없이 그냥 삽니다.

  함께 있으면 꽉 막힌 것 같아 참 답답합니다.”

 

‘향하여’의 목표가 없을 때

어디나 닫힌 감옥이요, 방황에 무기력한, 무절제한 삶입니다.

 ‘향하여’를 통하여 형성되는 삶의 꼴, 얼굴의 꼴입니다.

나이 40 넘어 자기 얼굴에 책임지라는 말은

바로 자기 얼굴의 꼴에 책임지라는 말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누구를 향하여의 삶인지요?

며칠 전 죽음을 맞이한 한 수도 선배가

제대 앞에 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흡사 평화로이 잠든 모습 같기도 하고

그 얼굴은 무엇인가 향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참 가난하고 겸손한 봉헌된 모습이었습니다.

평범하게 보아 넘기는 죽음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파란만장한,

그러나 미완의 삶의 역사, 삶의 무게, 삶의 깊이를 지녔기에

저절로 숙연해져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문제는 그 삶의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때문에’와 ‘위하여’

그리고 ‘향하여’가 충족된 삶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셋이 빠진 제멋대로의 본능적 욕망에 따른 삶이라면

참 꼴 없는 허무한 인생일 것입니다.

삶의 이유를 묻는 '때문에'요,

삶의 의미를 묻는 '위하여'요,

삶의 목표를 묻는 '향하여' 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의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두요

그리스도를 향하여 꼴 잡아 가는 우리 삶, 우리 얼굴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삶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무의미한 삶이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공동전례를 통해 하느님을 상징하는 성전 중앙의 제대를 향하여,

성전 앞 중앙 벽에 달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향하여

부단히 우리 삶의 꼴을 잡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 은총의 대림 시기는 탄생하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부활 시기는 부활하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뚜렷이 방향 지어진 삶을 살라는 의도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제목 아래

무수한 인물들이 향하는 바,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습니다.

알든 모르든,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있는 족보상의 모든 인물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방향 지워져 있음을 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 사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 사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 사대이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날 때까지 당신의 때를 기다린 하느님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당신 구원섭리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끝까지 기다리신 결과가 모든 인류가 오매불망 고대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당신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누구도 쓸모없다 버리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의 삶이라면

바로 하느님 구원의 도구가 되어 살게 됩니다.

참 놀라운 것은 족보상의 다섯 여인입니다.

윤리적으로 보나 인간적인 눈으로 보나 참 불우하고 보잘 것 없는 여인들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한 다말, 예리고의 소문난 창녀 라합,

보아즈를 유혹하여 결혼한 룻, 남편을 전사케 한 다윗과 결혼한 바쎄바,

모두가 기이한 인연으로 아들을 낳았던 여인들이요

하느님은 이들을 모두 당신의 귀한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고,

처녀의 몸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에게서 구원신비의 절정을 이룹니다.

매사 경솔한 판단은 보류하고 하느님의 구원섭리의 맥락 안에서

깊고 넓은 시야로 봐야 함을 깨닫습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야곱의 유다에 대한 예언이

그의 후손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히 성취됨을 봅니다.

복음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낳고’ ‘낳았으며’ ‘낳다.’ 라는 말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끝없이 열려있는 하느님의 구원사요,

계속 아기를 낳아야 하느님도 계속 구원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데

출생률이 낮은 오늘의 현실이 참 우려가 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편입된 우리들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안에서 우리 믿음의 족보를 확인하며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삶을

새롭게 정비하며 꼴을 갖추는 복된 시간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 때

저절로 꽃처럼 피어나는 정의와 평화의 삶입니다.

 

“주님의 시대에, 한반도에 정의가 꽃피게 하소서.

  큰 평화가 영원히 꽃피게 하소서.”(시편72,7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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