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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앙과 신념의 차이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0 조회수400 추천수6 반대(0) 신고
 
 

신앙과 신념의 차이 - 윤경재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8-38)

 

 

 

넓고 푸른 바다에 나가면 왠지 기분이 상쾌하고 좋아집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갖가지 상념에 빠집니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연이어 밀려오는 파도에 따라 들락날락 거리며 즐거워하기도 하고 집채만 한 파도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시야를 넘어서는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면 온갖 세파에 휩싸여 궁상떨던 저 자신이 문득 초라해집니다. 그만, 바다에 안겨 바다를 닮고 싶어집니다. 

바다는 지구 위의 온갖 물이 다 합쳐진 곳입니다. 지구 표면의 71%를 차지할 만큼 넓습니다. 온갖 것을 수용할 만큼 넓음에도 바다는 항상 파도가 칩니다. 물결 위에 늘 세찬 바람을 몰고 다닙니다. 이에 비해 작은 물방울은 옹골차지만, 평생 가야 물결 치는 법이 없습니다. 물결 치지 않는 물방울은 자신도 모르게 증발하거나 어디론가 자리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문득 신앙과 신념이 바다와 물방울 차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은 언제, 어떻게 파도칠지 모르는 바다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신념은 하나의 물방울을 지키고자 물결도 치지 않은 채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일흔다섯 해 동안 멀쩡히 잘 살았던 하란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 말씀을 의지해서 그분께서 이끄시는 대로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자기 생에서는 실현될 리 없는 약속,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불려 주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따랐습니다. 수없이 닥쳐오는 파도 같은 고난을 헤쳐나가며 간절히 기다리던 아들을 낳은 나이가 백 세였습니다. 그런 아들마저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셨고, 그는 그 말씀에 따라 아들을 바치려 하였습니다.

신앙은 진리이신 하느님 말씀에 마음을 열고 그 결과가 무엇이 됐든, 자신을 어디로 이끌고 가든 상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념은 자기가 옳다고 규정지어 놓은 것에 매달려 고치처럼 장벽을 치고 웅크린 채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념은 안전을 제공합니다. 언뜻 자기 확신을 추구하기에 옹골차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종종 파도처럼 흔들리기도 합니다. 세찬 폭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엄청난 간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순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20세기 가장 위대하고 존경받았던 빈자의 성녀, 마더 테레사도 “주여, 당신이 버린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어둠의 절규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녀는 그런 절규 중에도 낙망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성모 마리아의 물음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지닌 한계를 읽습니다. 주님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상황에서 미지의 세계로 던져지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마리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갈바리아 언덕 십자가 위에서 허망이 숨을 거두시는 아드님을 지켜보아야 할 때까지 마리아의 삶은 빛과 어둠 사이를 수없이 왕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끝내 그 신앙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 속에 늘 깨어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신앙과 신념을 혼동하곤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지만, 신념은 자기 폐쇄입니다. 자기만족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어느 때는 기쁨과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스승들은 거기에 머무르지 말라고 항상 훈계하십니다. 

가톨릭 영성은 자기만족에 머무는 것을 늘 경계해 왔습니다. 모든 영성의 대가께서 이끄시는 가르침은 한곳에 머무르지 말고 진리를 향해 죽음의 끝까지 밀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안식이 없다고 각오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놀람(敬畏)과 응답’을 우리도 동시에 지녀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영성의 길은 둘 중의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된 신앙의 길은 평생 아드님을 바라보고 사신 성모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본받는 것은 옷본을 뜨는 것처럼 똑같이 재단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옷본을 두고서도 제멋대로 마름질한다면 그는 본받는 것이 아닙니다. 옷감 위에 옷본을 대고 그림을 똑같이 그리고 나서 가위질하듯이 우리도 자신 위에 성모님을 대고 그림을 그리고 나서 마름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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