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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부모 역할의 중요성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0-12-23 조회수821 추천수14 반대(0) 신고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대림 제4주간 목요일 - 아픔만큼 성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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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름에 ‘바오로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대학 프로그램에 따라 거의 한 달간 터키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헤드폰을 많이 껴서인지 아니면 바이러스가 들어가서인지 중간쯤부터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단순한 것으로 여겨 여행을 마친 뒤 로마로 돌아와서 병원에 갔더니 입원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갖은 검사와 치료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로는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그렇다고 했지만 아무리 주사를 놓아도 좋아지지가 않았습니다. 한 십일 정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였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우 겸손해짐을 느꼈습니다. 이태리는 병원 치료비가 무료입니다. 대신 간호사들이 자신들이 돈을 대신 내주는 양 입원 자들을 불친절하게 대합니다. 완전 구걸하는 사람처럼 간호사들의 호통에 기가 죽어야했고 의사들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찾아주는 사람들이 너무 고마워서 나가면 정말 잘 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만큼 겸손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퇴원하고 나서는 또 똑같아졌습니다. 건강하니 몸이 안 좋을 때의 겸손함도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이든 청하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솔로몬에게 하신 것처럼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통과 멸시를 주소서.”

그리고 죽기까지 고통과 멸시 속에 사시다가 돌아가실 때도 홀로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곳에 가서 쓸쓸하게 돌아가십니다.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어떤 수녀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수련할 때 주님께 고통을 청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돼요. 너무 힘들어요. 고통은 함부로 청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우리들은 성인들처럼 바로 고통을 청할 처지가 못 됩니다. 다만 하루하루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벅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고통이 고통이 아니게 됩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은 너무 작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더 큰 고통을 청하게 됩니다. 왜 고통을 청하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리야는 벙어리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처음엔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가 요한의 할례가 있는 날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아이에게 요한의 이름을 붙여주라고 하면서 묶였던 혀가 풀리게 됩니다.

즈카리야는 혀가 묶여 있던 기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잉태된 아기를 보면서 자신이 믿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음이 생겼고 그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믿음을 증거합니다.

천사가 즈카리야게게 주었던 것은 벌이 아니고 은총이었습니다. 고민하고 반성하고 더 큰 믿음을 얻게 하는 침묵의 시간을 제공해 준 것입니다.

 

살다가 힘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어머니도 고통 없이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인들이 고통을 청하는 것은 고통이 그만큼 나 자신을 겸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고통을 받음으로써 원하지 않아도 스스로 겸손해지는 은총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작은 아들이 재산의 반을 청할 때 아버지는 말리지 않습니다. 아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재산을 다 탕진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의 반을 잃을지라도 아버지 없는 고통 속에서 더 겸손해져서 돌아올 아들을 위해 참고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아들은 돼지가 먹는 쓴 도토리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정도로 거지의 몰골이 되어서야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고통 속에서 새로 태어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버지는 고통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사실은 아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셨고 그렇게 새로운 아들을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힘이 든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누구도 그 분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이 고통이 나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고통일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부모 역할의 중요성

 

유학 나와서 여기저기 살고 있는 적지 않은 해외 교포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부모의 역할에 따라 아이들의 모습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외국에서 태어나 그 나라 학교에 다녔음에도 한국말을 잘 하였습니다. 그러나 알아듣기는 하여도 거의 한국말을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한국말을 못하는 한국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또 한 성당 주일학교에서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교리 선생님들이 우리나라 말이 아닌 그 나라말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보니 당연히 한국말보다는 학교에서 쓰는 말이 아이들에게는 더 편하고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태리 한인 신문에 전 이태리 한국말 경시대회에서 1등한 아이 얼굴이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가 가끔 가는 한 한국식당의 중학생 딸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이전에 아이들이 한국말을 잘 하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집 안에서 아이들이 이태리 말을 썼다가는 아버지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 아버지 철학은, 외국어를 잘 하더라도 한국어를 못하면 크게 쓸모가 없지만, 두 언어를 동시에 잘 구사하기만 하여도 통역 등을 할 수 있기에 굶어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태리 말이야 학교 다니면 당연히 잘 하게 되는 것이니 부모의 역할은 억지로라도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처음엔 아이들이 집에서 의사소통하는 것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학교에서 이태리 말도 빨리 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부모에게 감사해할까요, 아니면 자신의 자유를 빼앗아간 부모를 원망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아이들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에게 종교의 선택권을 주겠다고 아이가 다 클 때까지 성당도 안 보내고 세례도 주지 않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자녀를 위하고 부모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일까요?

한나는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도하여 얻은 사무엘을 본인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성전에 바칩니다. 사무엘의 인생은 어머니에 의해 결정이 된 것입니다. 어쩌면 사무엘이 어머니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의 큰 획을 긋는 첫 번째 예언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다 아기 이름을 아버지를 따라 즈카리아로 부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만 ‘요한’이라 합니다. 요한은 천사가 가르쳐 준 이름이고 앞으로 아이의 운명이 들어있는 이름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지자로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 의해 그렇게 결정된 운명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물론 사무엘과 마찬가지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는 해방자, 구원자란 뜻입니다. 예수님도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삶을 살도록 미리 정해진 나지르인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자가 되기로 결정된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이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소명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부모가 아이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나무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누가 봐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제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알면서도 주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오히려 부모가 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이의 영혼을 구하고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재산임을 안다면 아이의 자유는 거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책임지고 선택할 나이가 차면 자유롭게 결정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줄 수 있을 때 주어야 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부모는 항상 아이에게 ‘즈카리야’란 이름을 주어야 하는지 ‘요한’이란 이름을 주어야 하는지 갈등하게 됩니다. 옆집 아이들은 다 대학입시 준비한다고 성당 내보내지 않는데, 나만 요한이란 이름을 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게 되기도 합니다. 보통 성당에서 초등학부 주일학교 다니던 아이 열 명 중 한 명만 중고등부 교리에 나와도 잘 되는 본당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의 자유에 맡긴다고 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원하는 ‘즈카리야’란 이름을 자녀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성당 안 갔다 오면 어머니께 매우 혼이 났습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때 배운 교리가 평생 저를 잡아주고 있음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아이 때 가장 깊이 새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때 우리를 그렇게 강요한 어머니를 미워해야 할까요? 오히려 감사해합니다. 왜냐하면 쓴 약이지만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먹여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억지로라도 가장 좋은 선물, 즉 믿음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하지 못하면 커서는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어렸을 때 즈카리야란 이름을 주고 나중에 요한으로 바꾸려고 한다면 쉽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즈카리야가 요한이란 이름을 주고 혀가 풀려 주님을 찬미하였듯이, 우리도 주님께 받은 자녀들을 다시 주님께 돌려보내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 나의 하느님 >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cyworld.com/30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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