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는 무엇을 찬미하는가?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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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10-12-24 | 조회수391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그는 무엇을 찬미하는가? - 윤경재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68-79)
즈카르야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할례식에서 이름을 지을 때 자기 이름을 따라 짓기를 포기했습니다. 대신에 요한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를 수용하자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습니다. 자기 고집을 꺾으니 병이 나은 것입니다. 그는 어렵사리 얻은 아들을 자기만의 소유에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아들로 내어 놓았습니다. 오랫동안 아들 하나를 얻으려고 간절히 매달렸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집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집착은 화살이 나를 향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해 쏜 화살은 내 안에 상처를 남깁니다. 지난 아시안 게임 때 남자 단체 양궁 결승전이 손에 땀을 쥘 만큼 아슬아슬했습니다. 마지막 엔드를 남겨두고 우리 선수들이 중국 선수들에게 몇 점 뒤처졌습니다. 먼저 쏜 우리 선수들이 222점을 얻으며 경기를 마쳤습니다. 남은 중국 세 선수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우승은 그들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우승에 대한 과도한 압박감은 손을 떨리게 하였고 과녁을 제대로 겨누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앞선 엔드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점수를 얻지 못했던 한 선수가 또 실수할까 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두려움에 시위를 당긴 그의 화살이 떠나자 그의 억눌린 마음도 함께 과녁에 닿았습니다. 그러자 그날 얻었던 점수 중에 가장 나쁜 점수 6점을 얻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갈채와 열망이 일순간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평소에 훈련하던 자세와 마음가짐을 잊은 것이었습니다. 다른 두 선수가 자신에게 보내는 응원의 힘과 군중의 기대를 부담감으로 바꾸었습니다. 자기가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이웃이 보내는 힘을 보태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까지 빼앗긴 것입니다. 단체 경기는 선수 간에 호흡이 중요합니다. 이때 말하는 호흡이란 각 선수의 능력을 합한 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시너지 효과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플러스 알파를 이끌어 내는 호흡은 중요합니다. 그 호흡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릅니다. 참 단순한 이치임에도 플러스 알파를 이끌어 내는 그 호흡을 붙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축구나 야구 같은 단체 구기 종목은 특히 시너지 효과를 내는 호흡이 중요합니다. 그날 각 선수가 집중하고 화합하여 자신의 힘보다 전체의 능력을 이끌어 내려 할 때 멋진 경기 내용을 보여줍니다. 개인의 성적에 연연하여 돌출행동을 하는 선수가 나타나면 그날은 선수 간에 이어진 호흡이 여지없이 무너져버립니다. 마음속에서 그런 선수를 비난하는 감정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좋은 경기를 해야겠다는 열망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운동 경기에서는 영원한 약팀도 강팀도 없습니다. 마지막 호각이 불어야 경기 결과가 나옵니다. 자주 의외의 결과가 나오기에 팬들이 그렇게 열광하는 것입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며 바치는 기도를 살펴보면 참으로 단순하고 익히 알았던 사실 뿐입니다. 특별한 내용이 아닙니다. 거룩한 예언자들이 예로부터 예언한 사실일 뿐입니다. 그동안 즈카르야가 자신의 곤고한 처지에 매달려 미처 살피지 못하고 잊어버렸던 것뿐이었습니다. 양궁 결승전에서 마지막 화살을 빗나가게 쏜 중국 선수가 저지른 잘못을 즈카르야도 범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운 자라야 더 큰 업적을 낸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그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곤 자신에게 화살을 쏘아 상처를 내었습니다. 아들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다는 의미는 자기의 뜻을 꺾고 하느님께 전부 의탁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벙어리가 된 이후 크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향하던 시야를 공동체 전체로 돌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 역사의 흐름을 통찰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앎은 고난을 통해 얻은 지식이었습니다. 남에게 들어서 배운 학이지지(學而知之)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가며 체득한 곤이지지(困而知之)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힘 있고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지상에 내려오신 메시아는 개개인에게 향하던 시각을 공동체와 하느님께 돌리라는 가르침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하면 뜻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더 크게 받는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늘에서 나누었던 사랑을 이 땅에서도 베푸시러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즈카르야는 이제 곤이지지도 학이지지도 아니라 청이지지(聽而知之)를 찬미합니다. 우리더러 다시는 자기와 같은 곤고함에 머물지 말고 함께 그 길로 들어서자고 권유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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