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 - 12.27,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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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0-12-27 | 조회수369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0.12.27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1,1-4 요한20,2-8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라 사랑도 먹어야 삽니다. 사랑을 먹고 크는 생명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생명입니다. 사랑에서 울어난 자발적 생명의 욕구, 일치의 욕구가 스킨십입니다. 아기 시절, 이런 스킨십을 통한 생명의 욕구가 결핍되었을 때 정서불안에 자폐증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 화답 송 후렴에서처럼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이 의인들에게 기쁨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1독서에서 주님의 애제자인 사도요한은 ‘사랑하는 여러분’으로 시작하여 ‘생명’ ‘영원한 생명’ 이란 말을 무려 5회에 걸쳐 사용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의 대가인 사도 요한의 고백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에서 솟아나는 희망이요 빛이요 생명입니다. 사랑의 사람들은 절망 중에도 희망을, 어둠 중에도 빛을, 죽음 중에도 생명을 노래합니다. 가야금의 명인 황 병기님의 고백입니다.
“사람이 비참하면 비참한 곡을 쓰고 슬픈 곡을 쓸 것 같죠. 그렇지가 않아요. 반대로 돼요. 아주 소녀같이 아름다운 곡을 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쓴 것이 ‘시계탑’입니다. …베토벤이 멋있는 것은 귀가 먹어 비참하게 됐는데도 그의 작품은 더 희망차고 아름답게 됐다는 것이죠.”
사랑할 때 절망과 죽음의 상황 중에서도 샘솟는 희망이요 생명임을 봅니다. 사랑의 예언자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의 희망으로 빛나는 예언들 대부분이 절망과 죽음의 어둠 속으로부터 탄생된 것입니다. 살기위해서 희망을, 사랑을, 생명을, 빛을 노래할 수뿐이 없었던 예언자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전례가 간절할 수뿐이 없습니다.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서, 사도 요한처럼 영원한 생명의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을 갖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으로 깨어 활짝 열려 있을 때 주님과 사랑의 친교, 스킨십 이루어지고 충만한 기쁨에 내적 변화에 마음의 상처와 영적 자폐증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스킨십의 친교로 충만한 기쁨에 참여하라는 사도 요한의 권고입니다. 사도 요한은 넘치는 사랑으로 주님을 향해 오관이 활짝 열렸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여실히 입증됩니다. 열정의 사랑으로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도착한 애제자 사도 요한이요, 빈 무덤을 보는 순간 마음의 눈이 활짝 열려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직감적으로 깨닫는 사도 요한입니다. 눈이라 하여 다 똑같은 눈이 아님을 봅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봄'과 깨달아 '앎'과 '믿음'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과 사랑의 스킨십의 친교로 우리를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며 영육을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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