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와 나 사이에는 강물 하나가 흐른다. - 최강 스테파노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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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0-12-28 | 조회수676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너와 나 사이에는 강물 하나가 흐른다.
멕시코시티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가량 남쪽으로 내려가면 ‘와스떼뻭oaxtepec’이라고 하는 조그만 도시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네 분의 한국 수녀님들과 세 분의 멕시칸 수녀님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진료소와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지내고 계십니다. 요 며칠 대림시기를 맞아 그곳으로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나흘 동안 아무 걱정도, 수고도 없이 수녀님들께서 베풀어주시는 맛있는 한국음식과 포근한 잠자리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려고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이렇듯 다른 분들의 수고와 배려의 덕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의 식당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콩알만 한 고양이 ‘마스까리따mascarita’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식당에 쥐가 출현을 해서 옆 집 할머니 집에서 한 마리를 입양시켜서 키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주먹도 안 되는 어린놈이라서 아직도 엄마고양이의 품이 무척 그리울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엄마고양이가 가끔씩 그 녀석의 울음소리를 듣고 근처까지 다녀간다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수녀원에는 또 두 마리의 집채만 한 개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돌쇠’와 ‘해피’라는 이름의 새까만 털로 뒤덮인 녀석들인데 얼마나 살벌하게 생겼는지 저는 그 놈들이 풀려서 돌아다닐 때면 밖으로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수녀님들도 개들 이름을 지을 때면 좀 분위기 파악을 해가면서 이름을 지어야지요. ‘돌쇠’라는 녀석의 표정은 아무리 찬찬히 뜯어봐도 전혀 순박한 구석이 없고, ‘해피’ 역시 전혀 해피하지 않는 표정으로 하루 종일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갈 때쯤이면 행여 도둑이라도 들까 염려를 하게 되는 수녀님들은 그 놈들을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낮 동안 개집에 갇혀 있던 ‘돌쇠’와 ‘해피’는 그야말로 맹수猛獸들처럼 침을 질질 흘려가며 온 수녀원을 뛰어다닙니다. 수녀님들은 자꾸 저보고 그 녀석들이 한국 사람은 알아보고 공격하지 않는다며 괜찮다고 하셨지만, 글쎄 제가 없을 때 한 수녀님이 다른 수녀님에게 ‘진짜로 저 녀석들이 한국 사람은 공격하지 않나요?’라고 묻는 것을 우연히 엿들은 뒤로는 절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개들이 여권을 조사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국적 따져가면서 공격을 한답니까?
아침 6시에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풀어놓은 개들을 개집에 가두어 놓겠다는 원장수녀님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 무방비 상태로 제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 어둠 속에서 저를 향해서 달려드는 ‘돌쇠’와 ‘해피’를 발견하고는 ‘아~~~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다리야, 날 살려다오’하면서 다시 제 방문 안쪽으로 도망을 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 녀석들과 친해지고 싶은 원의를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날 오후,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개집에서 풀려난 ‘돌쇠’와 ‘해피’가 평소 같으면 미친 듯이 수녀원 구석구석을 뛰어다녀야 하는데 그날따라 식당 주변에서 벗어날 줄을 모르고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어 생후 2주 된 ‘마스까리따’를 열심히 부르면 찾아보았지만 식당 안 어디에도 새끼 고양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찾아 헤맨 뒤에야 ‘돌쇠’와 ‘해피’하고 겨우 문 하나를 사이에 둔 기둥 뒤에 숨어있는 ‘마스까리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생후 2주된 새끼고양이에게는 그야말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금시초문의 맹수들이 자기 앞에 딱 나타나 있는 셈이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온 몸의 털이 수직으로 바짝 서 있는 채로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마스까리따’를 보면서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모릅니다.
한 수녀님이 번쩍 들어 안아 쓰다듬으며 연신 괜찮다고 하셨지만 그 녀석의 쭈뼛 선 털들은 한참 동안 그 상태로 그러고 있었습니다. 제게도 엄청난 공포감을 주는 험악한 인상의 새까만 개들 앞에서 얼마를 덜덜 떨고 있었는데 금방 괜찮아질 수가 있겠어요? 당연히 괜찮지가 않겠지요. 아무래도 제가 그 두 녀석하고 친해지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녀석들하고 적당하고 안전한 간격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서로에게 필요한 간격도 줄어들겠지요. 아마도 ‘마스까리따’에게는 평생 동안 적당한 간격을 지키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개와 고양이의 사이에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간격! 적당한 간격! 이 적당한 간격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느낌이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빨리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싶어서 서로를 향해 성급히 달려드는데, 이보다 관계를 망치는데 더 좋은 역할을 하는 것은 없을 듯싶습니다. 정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가까이 두고 오래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적당한 간격’이 꼭 서로를 가로지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적당한 간격’이라는 강물이 시간을 두고 오래오래 흘러가야 합니다. 그 강물을 사이에 두고 빨리 가까워지기 위하여 서두르지 않으며 천천히 오래오래 서로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너’와 ‘나’ 사이를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언뜻 언뜻 느껴지는 차가움은 더 오래, 더 깊이 함께 흘러가기 위한 기다림과 그리움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렇게 적당한 간격을 두고 흐를 수 있는 인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것은 차라리 예술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적당한 간격에 ‘말씀’이 함께 흘러가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입니다. 흔히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호불호好不好를 따지곤 하지만 이것은 하루에도 백번도 넘게 변할 수 있는 우리들의 간사한 입맛에 불과합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혹은 나쁜 사람이라고 상대를 판단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존재가 좋거나 혹은 나쁘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그 사람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나의 주변 사람들이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해 준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나 자신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맛에 따라 내가 춤을 춰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그릇된 판단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말씀’이라는 강물 하나가 흐르고 있어 ‘우리’가 그 강변의 이쪽과 저쪽에 서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함께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르면 들릴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두고 흐르는 말씀의 강물을 따라 걸으며 콧노래도 부르고, 시도 한 수 읊조리다 보면 어느 새 우리들의 인생은 황혼이 지는 황금빛 찬란한 강나루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온통 빛으로 가득 한 강나루에서 조용한 휴식을 취할 때까지 오래, 깊이 함께 흐르고 싶은 인연을 만나거든 성급히 강을 건너서는 아니 됩니다.
물이 만나고, 물이 갈라질 때까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사람을 두고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너무 기뻐하거나, 너무 슬퍼하거나 하지 않고 유유히 흘러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출렁이는 강물에는 ‘나’도 ‘너’도 서로의 진면목을 비추어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는 강물 하나 만큼의 적당한 간격을 두어야 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는 강물이 흘러야 합니다. ‘너’와 ‘나’의 본래의 모습을 비추어 줄 수 있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8,32)”
▒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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