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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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요하 | 작성일2010-12-29 | 조회수48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네
1969년 7월 군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에서 6주간의 교육을 마친 다음 나는 논산훈련소 제28교육연대의 훈련조교가 되었다. 제9중대에서 열심히 조교생활을 했다. 새로 받은 병력 중에 KBS 전주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입대한 아나운서 훈련병이 있었다. 핸섬하게 생긴데다가 어느 정도 지식과 교양이 있어 보이는 그를 나는 쉽게 알아보았고, 그와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조교와 훈련병의 엄격한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친근한 감정을 갖게 되었고, 나는 그에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었다. 그 친구 한 사람 덕분에 그가 속한 소대는 적어도 나한테서만은 대우를 받는 차원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중대는 학과 출장을 나가 최초로 사격 연습을 하게 되었다. 사격장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살벌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마련이었다. 군기가 바로 생명이었다. ▲ 논산훈련소 조교 시절 / 1970년 초여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꼭 40년 전의 모습이다. 훈련병 학과 출장 중 휴식 시간에 찍은 사진인 것으로 생각된다. 함께 찍은 신인식 하사(왼쪽)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한다. ⓒ 지요하 / 논산훈련소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능숙하게 훈련병들 군기를 잡고, 교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사격연습이 진행되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 불발탄은 따로 모아서 부대로 가져가는데, 불발탄 모으는 일을 하던 중 나는 엉뚱하게도 장난기가 발동했다. 한 차례 사격연습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불발탄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 아나운서 친구에게 불발탄임을 보여 주었다. 탄약의 뇌관에 방아쇠 공이가 찍힌 자국이 뚜렷했다. 그렇게 방아쇠 공이가 뇌관을 찍었는데도 그 실탄은 발사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 불발탄을 내 MI 소총에 장전했다. 그리고 총구를 그 친구의 가슴팍에 들이대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금방 방아쇠를 당길 자세였다. 그 친구는 실실 웃고 있었다. 내 행동이 장난임을 인지한 나머지 웃는 것일 수도 있었고, 불발탄임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웃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웃음에 화답하듯 씩 웃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 논산훈련소 조교 시절 / 내가 베트남 전장으로 가기 직전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신인식 하사를 지난 40년 동안 만나지도, 소식도 듣지 못했다. 지금도 살고 있다면 어느 하늘 밑에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 지요하 / 논산훈련소 조용하던 사격장에 단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특히 중위 교관은 순간적으로 사색이 되었다. 다행히 총탄만 발사되었고 별다른 사고가 생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교관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서는 마구 쪼인트를 깠다. 학과 출장을 마치고 중대로 돌아왔을 때 교관은 모든 조교들을 중대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말년 고참하사와 고참병장, 두 사람에게만 쪼인트를 까고 교관이 중대본부로 들어가 버린 다음 고참하사와 고참병장은 ‘줄빳다’를 실시했다. 줄빳다란 서열 순으로 ‘엎드려뻗쳐’를 한 다음 첫 번째 병사가 다음번 병사 엉덩이에 빳다를 한 번 치면 두 번째 병사는 다음 병사에게 빳다를 한 번 더 치고 해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한 대씩이 플러스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맨 마지막 병사는 가장 많이 맞게 되는데, 병사들 수에 따라서는 열 대도 넘게 맞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맨 마지막이었다. 나를 겨냥하여 줄빳다가 실시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몇 대나 맞았는지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 열 대가 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별로 아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감지덕지하는 마음이었지 싶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 가슴팍에 바짝 들이대고 총을 쏘았는데 실탄이 그 친구를 비켜나갔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기하고 다행스러워 나는 매를 맞는 것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날 그렇게 사격장에서는 교관으로부터 쪼인트를 까이고, 중대로 돌아와서는 줄빳다를 맞았지만, 그 ‘오발’ 사건은 논산훈련소에 한 가지 특별한 사례로 꼽히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조교 노릇을 하면서 한 번도 불발탄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불발탄을 다른 총에 장전하여 쏘면 발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무에게서도 듣지 못했다. 불발탄은 그야말로 실탄 자체가 불량품이어서 절대 발사가 되지 않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잘못 알고 있었다는 내 실토는 중대장과 연대장을 거쳐 훈련소장에게도 보고되어, 그 다음부터는 불발탄에 대한 교육도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 격구대회 우승기념 / 1969년 가을, 제2군사령부 창설 15주년기념 격구/사격대회에서 논산훈련소가 두 가지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나는 논산훈련소 대표 격구선수였다. 우승하고 돌아와 소본부 연병장에서 박남표 소장과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25일의 특별 포상휴가도 받았고... 맨 앞줄 왼쪽 끝에 내가 앉아 있다. ⓒ 지요하 / 논산훈련소 나는 그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등에도 진땀이 흐른다. 만약 실탄이 그 아나운서 친구의 가슴팍을 뚫어서 그가 절명을 했다면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을 것이다. 꽃다운 청년의 목숨을 앗아버리고 나는 포승줄에 묶여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어 가고 군사재판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내 잘못으로 중대장과 연대장은 물론이고 훈련소장까지 큰 화를 당했을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천만다행이고, 천행 중의 천행이다. 그래서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성호를 긋곤 한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신기함을 반추하곤 한다. 나는 그때 분명히 그 아나운서 친구의 가슴팍에다 총구를 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실탄은 그 친구의 어깨 너머로 날아갔다. 왜 그런 결과가 생겼을까?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0․1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신비한 힘의 작용이 있었다. 누군가가 총부리에 손을 대고 옆으로 밀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아나운서 친구는 물론이고 아무도 그렇게 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의 미묘한 질감을 잊지 못한다.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총부리를 옆으로 밀치는 것 같았던 어떤 힘의 작용을…! 그 기억의 파들거림으로 나는 다시 성호를 긋는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고통 가운데서 기쁨과 감사의 꽃이 피어남을 느끼며…. 그날 그 순간의 신비한 힘의 작용 때문에 오늘의 내가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30일 아들 녀석이 논산훈련소에 입영했다. 아들 녀석의 입대 하루 전 날이던가, 40년 전 논산훈련소 28교육연대 조교였던 내 군대 시절 이야기 하나를 가족들에게 들려주게 되었다. 논산훈련소, 베트남 전장의 백마사단 도깨비연대, 최전방 대성산 철책선 등 군대 시절 이야기들이 많지만, 가장 명료하면서도 마음 속 깊이 아껴왔던 이야기를 가장 최근에 가족들에게 들려주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를 오늘 인터넷 매체 독자들께 소개한다. 최근 출간된 ‘한국가톨릭문인회’의 신앙 에세이집 『몸, 영혼의 거울』에 수록된 글임을 밝힌다. 10.12.28 14:46 ㅣ최종 업데이트 10.12.28 14:46 태그/ 논산훈련소, 불발탄, 조교생활 출처 : 방아쇠를 당기던 순간 하느님의 손길이 있었네 - 오마이뉴스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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