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제 기도찬미의 밤, 많은 분들이 오셨고 또 주무시고 가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영성의 집에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마 찜질방에 가서도
주무시기도 하고 또 그 와중에 또 묵주반지까지 잃어버리신 분이 계시다니 찾으셨습니까?
묵주반지.....아까 뭐 해설자가 ‘묵주반지 찾아가라.’
그러는데 아 그래서 다음 달부터는 참 찜질방에 재워드리는 것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방을 또 그사이에 만들 수도 없고....
그래서 생각하다가 우리 감곡신자분들이 협조만 한다면 요 근처에 방이 남아돌아가면....
홈스테이라고 그러죠?
사오십 명이라도 우리 신자들이 모셔다가 하룻밤이라도 잘 지내게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주무셨죠?
저기 아까 보니까 예비자분들이 86명이 왔다고... 손들어보십시오.
어디 계십니까? 예비자 분들....
여든 둘 밖에 안 되네요?
예, 손 내리십시오.
세례받기도 전에 이 거룩하고 특별한 성지에 여러분들이 초대받으셨으니
이 자리에 오신 예비자분들은 참 복되십니다.
그리고 또 오늘 이곳에 순례오신 분들도 복되시고
또 새해 첫 주일 우리 감곡신자분들 또 순례자분들에게 많은 복이 내려가기를 기원합니다.
아, 저는 결혼을 안 하고 살아가는 사제이기 때문에
솔직히 남녀 간의 사랑이 그렇게 애절하고 좋은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긴 세월을 신자들을 지켜볼 때
‘야, 신부 잘못됐다. 저렇게 부부사이가 예쁜걸 보니 나도 장가를 갈걸!’
질투가 날정도로 이쁘게 사는 부부들을 내 생애에 열손가락에 꼽을까?
저도 ME지도 신부도 했고, 수많은 부부들을 봤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뭐냐?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것이 훨씬 백배 어렵다.’
맞습니까?
교우 분들은 ‘아이구 신부님 참 힘드세요....’
속으로 ‘니가 힘들지. 내가 힘든가? '
이 한 몸뚱아리 사는 것도 이렇게 고달픈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 둘이 만나서....
또 둘만 만납니까?
양쪽 집안에서 끈이 또 수백 개가 딸려오죠?
또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지가 원하는 데로 다 됩디까?
그러니까 아무튼 결혼하는 순간부터....
참 그래서 혼배주례를 수도 없이 했지만 이렇게 강복을 주고
웨딩마치에 맞춰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에휴, 안됐다.’
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보니까 시집 안 간 처녀총각들도 많은데...
오늘 결정하세요.
다 신학교 가고 다 수녀원 들어갈 걸 결심을 하세요.^^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하루에도 깨가 서 말씩 쏟아져.
그렇게 금슬이 좋았어.
아 그런데 부인이 시름시름 앓더니 암이라고 하는 진단을 받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어.
이 남자는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억장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죠.
‘내가 이제는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
아내를 땅에 묻고 매일같이 그 무덤을 찾아갔어요.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신부님 제 슬픔을 어떻게도 표현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신부님이
“비석에다가 당신의 마음을 적어라.”
“뭐라고 적을까요?”
“내 인생의 등불이 꺼졌다.”
그래서 신부님이 시키는 대로 좋은 돌에다가
‘내 인생의 등불이 꺼졌다.’
아내의 무덤에다 탁 세웠어요.
그리고 육 개월이 지났는데 여기저기서 중신이 들어오겠죠?
처음에는 ‘내 앞에서 중신 얘기 하지마라. 나는 내 아내만 그리면서 살 거야.’
했는데 요게 또 맴이 달라지네.
한 일 년 지나고 나니까.....
아~ 그런데 어느 날 마지못해 끌려 나가는 듯이 나가서 선을 봤더니 세상에 뿅~~ 갔어.
너무너무 괜찮어~~그러나 전 부인한테 너무너무 미안했죠.
아무튼 결혼을 하긴 했어요. 했는데......양심에 가책이 됐는지......
전 부인을 묻으면서 뭐라고 약속했겠어요?
‘나 이제 절대 딴 데 한눈 안 팔고 당신만을 생각하면서 살 거야.’
아, 더군다나 비석에 뭐라고 적었어요?
‘내 인생의 등불이 꺼졌다.’
비석이 자꾸 눈에 거슬려요.
신부님한테 또다시 상담을 했죠.
“신부님, 그거 쓰라 그래서 썼는데 영 그것 때문에 신경이 거슬립니다. 신부님 방법이 없습니까?”
하니까 신부님이 귓속에다 대고 뭐라고 가르쳐줬어요.
며칠 있다 그 비석에서 사람들이 뭘 봤느냐?
‘내 인생의 등불이 꺼졌다.’
그리고 두 번째 줄
‘새 불이 또 켜졌다.’
사람끼리의 약속은 늘 깨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는 존재가 아니다.
신뢰하려고 애쓰는 존재지.
신뢰할 분은 누구? 그렇죠.
하느님 한 분이예요.
여러분 절대로 사람 믿지 마세요.
여러분 가슴속에 담아두고 살아가야 될 분은 하느님 한 분이예요.
저 인간이 나를 배신하듯이, 나도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그런 약한 존재지요?
오늘 새해 첫 주일미사를 드리면서 여러분들은 오늘 뭔가 하느님께 약속을 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드리는 약속은 비석에 줄 하나 바꿔서
지 마음대로 편한 대로 이렇게 약속했다가 그 다음에 뭐
‘내 등불이 또 켜졌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에게 하는 약속은 손바닥 뒤집듯이 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의 약속은 지극히 조심해야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약속도
‘주님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지,
고백성사 딱 보고 나오면서
‘주님, 이 죄 제가 절대로 내가 짓지 않으렵니다.’
그 다음날 또 짓는 거예요.
어떡할 것이냐?
요 며칠 사이에 우리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복이 뭡니까?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은 아주 쉽게 얘기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죠?
그런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안 믿는 사람들의 복이에요.
그런데 우리 믿는 이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사제가 여러분들에게
‘복 많이 받으세요. 자매님! 형제님 올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말할 때는 세속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 먹고 잘살고 아무튼 건강해라.
그 뜻보다도 훨씬 더 큰 뜻이 있어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복은 뭐냐?
뭘 것 같습니까?
어디 얘기해보세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복은 뭐겠습니까?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복은 올 한 해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워도
그 십자가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 사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복이요,
외롭고 눈물 나는 한 해가 되더라도
임마누엘 우리 하느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복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로 은총 자체이셨고 복 자체이셨습니다.
모든 은총과 복이 그분에게로부터 옵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님이 받은 복이 뭘까?
겨우 마구간에서 태어나고 가난한 목수의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고달프고 위험하고 외로운 전도 생활하다가 마침내는 사람 피 말려 죽이는
십자가형에 처형된 그 고달픈 생애가 그게 과연 복이겠는가?
그리고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하는 여인, 성모님이 받은 복이 또 뭘까?
인간적이 눈으로 볼 때 박복하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 아니었겠는가!
예수님 잉태하신 뒤에 약혼자였던 요셉이 말 한번 뻥끗 잘못하면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던 여인이었고....
외아들 낳으실 때도 바람하나 가릴 데 없는 마구간에서 낳으셨습니다.
성탄 때가 되면 마구간을 아름답게 치장을 하지만 마구간은 마구간입니다.
똥 냄새나는 더러운 곳이 마구간입니다.
예수님의 요람은 말구유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요셉은 세상을 떠나서 바람막이도 없었습니다.
의지할 데라곤 아들 하나뿐이었는데 그 아들이 나이 삼십 세가 되니까
집을 나가서 방랑선생 노릇을 하고 있죠.
나중에는 죽어가는 아들을 봐야 했고, 시메온의 예언대로
가슴에 칼이 박힌 듯한 삶을 사셨는데 이런 여인이 이게 복이 있는 여인이었겠습니까?
오죽하면 성모 통고 축일이 있을 정도 아니겠느냐?
저 위에 계신 성모님은 전 세계에 하나뿐인 성모칠고 성모님입니다.
인민군들이 그토록 저 성모님을 부서뜨리기 위해서 총을 갈겨댔지만
성모님은 당신 생애에 일곱 가지 고통을 표시하는 일곱개의 총알만을 받아들이셨고
나머지는 거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칠고는 뭡니까?
첫 번째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에집트로 피난 가셨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 헤맸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길에서 만났고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 밑에서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봤고
아들의 시체를 가슴에 품었고
아들을 장례 치른 이 일곱 가지의 고통이 바로 성모칠고
매괴성모님의 몸에는 성모칠고가 확연하게 새겨져 있고,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삶이나 성모님의 삶이나 박복하기 이를 데 없는 모자였습니다.
아마 이렇게 지지리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 하셨을까!
우리 신자들의 복이란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차원의 복과 다르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삶이 비록 고달프고 어려워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면 복이 됩니다.
오늘은 주의 공현대축일입니다.
메시아가 이방인들을 불러서 손수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례자들이 오늘 자기 발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불러서 성모님의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공현이라고 하는 말뜻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을 불러들여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만천하에~~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라고 하는 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날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메시아를 4천년 동안 기다렸던 유대인이었는데
그 메시아가 찾아와서 실제로 만난 백성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넌센스입니까?
유다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판단과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자기 재주로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은총은 의지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공로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머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쪽에서 주셔야 됩니다.
동방박사들을 불러야 됩니다.
동방박사들이 지가 지발로 온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인도해서 예수님이 불러들인 겁니다.
오늘 주일미사에 온 여러분들이 여러분 발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 양심에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오늘 아버지의 집, 엄마의 집으로 여러분을 불러주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동방박사들은 지금 거리로 환산하면 1200Km가 넘는 먼 거리를
온갖 위험을 무릎 쓰고 찾아와서 귀중한 선물로 경배하였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달랐지요.
분명 동방박사나 헤로데에게나 같은 모양의 같은 빛을 보여주셨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똑같은 별을 보고도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엄청나게 큽니다.
똑같은 강론을 이 자리에서 들어도 나중에 생각과 행동의 차이는 큽니다.
똑같이 성서를 봉독하고도 누구는 그 성서를 읽고 은혜를 받고 치유를 받지만
어떤 이들은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똑같이 피정 참석해도 어떤 이들은 회개가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시간에 분심, 잡념 속에서 피정을 보냅니다.
이렇게 똑같은 별을 보고 헤로데와 동방박사들의 행동양식이 달랐던 것은
욕심과 교만이 있을 때는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예수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도/ 우리 집에 나타나도/ 내 옆에 늘 계셔도
욕심과 교만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동방박사의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 보고 점검하는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첫 번째 별을 보고 그리스도를 찾아 나선 동방박사처럼
만사에 있어서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더 가까이 지내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예전에 신학교 때 저는 여러 방학을 나환자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나환자촌에 가보면 그 나환자촌에 들어오기 전에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와도 나병이라고 하는 낙인이 찍히면 아무리 좋은 집 자손 .아무리 명문대학 출신이라도 그것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죽으려죽으려 하다가 결국에는 나환자촌까지 들어옵니다.
인생막장을 사는 마음으로 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고난 방을 쓸다보면
손가락 하나가 쓰레받기 위에 올라가 있죠?
“이게 누구 손가락이야?”
그 때야 자기 손가락들을 보며
“어, 내께 떨어졌네....”
그렇게 손마디 하나하나가 똑똑 떨어져 나갑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갑니다.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중에는 그야말로 손발도 없고 배에다가 고무창을 깔고 지렁이처럼 기어 다닙니다.
그러면서도 그 몸뚱아리를 가지고 매일같이 미사를 나옵니다.
몸이 성한 사람은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배에다가 고무창을 깔고
오로지 주님만을 만나기 위해서 30분, 한 시간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레처럼 기어서 성당에 옵니다.
손이 있어야 성당 문고리를 돌리지요.
문고리를 돌리는 손가락이 없다 보니까 머리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
머리통이 터지는 사람도 있고, 일그러진 손으로 성서책을 넘길 수가 없어서
혓바닥으로 성서 책을 넘기면서 성서를 읽습니다.
손가락이 없다 보니까 묵주를 굴릴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팔꿈치에다가 고무줄로 나무때기 하나를 묶어놓고, 땅바닥에다 묵주를 펼쳐놓고,
나무때기로 하나하나 묵주알을 짚어가면서 묵주신공을 바칩니다.
꽃동네에 가면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 표현 가지고는 약합니다.
내가 내 손으로 묵주를 굴릴 수만 있어도 그건 주님의 은총이요.
내가 내 두 다리로 성당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것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나 은총 속에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늘 불평불만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묵주 굴릴 손가락이 없습니까?
성당 넘어설 발이 없습니까?
하느님께 감사하셔야 됩니다.
그 엉망진창의 몸뚱아리를 가지고도 오늘 동방박사들처럼
‘주님 만나러 가야 된다!’
기도를 놓지 않고 성당을 기를 쓰고 배로 기어서 옵니다.
우리는 너무너무 축복 속에 살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동방박사들이 어떤 고초를 겪으면서도 주님을 만나러 길을 나섰듯이...
그런 마음으로 올 한해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동방박사들은 그 어려운 먼 길을 걸어와서
아기 예수님에게 기쁘게 선물을 드렸습니다.
마지못해 선물을 드린 것이 아니라 성서에 보면 기쁘게 선물을 드렸다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예물과, 눈에 안 보이는 착한 행위를
올 한 해 동안 정성껏 우리는 기쁘게 봉헌합시다.
헌금을 내면서도 마지못해 내는 것이 아니라
교무금을 낼 때도 가장 정성을 드려서 미루지 말고 정성껏 봉헌합시다.
심는 대로 거두신다고 그랬습니다.
올 한 해 동안 내가 몸을 움직여서 봉사할 기회가 생기면
남의 눈치 볼 것도 없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느님께 기쁘게 육적인 봉사도 우리 하셔야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카인은 직업이 뭐였습니까?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였습니다.
하느님께 카인은 뭘 드렸습니까?
쭉정이를 속에다가 이렇게 섞어가지고 하느님을 속이고서는 선물을 드렸습니다.
아벨은 제일 기름지고 살찐 양을 드렸습니다.
머리카락까지 알고 계시는 하느님을 어찌 속이겠습니까?
하느님은 카인의 제물은 물리치고 아벨의 제물을 받았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카인처럼 그런 제물을 바치는...
그런 봉헌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선물을 드리십시오,
하나를 정성껏 드리면 열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먼저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마지막으로 세 왕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헤로데에게 다시 가지 않고
선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보고 즉 영세를 받고
미사 때마다 말씀과 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그 후에 모습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다시 옛날 그 죄악의 길로 다시 갈 것인가!
아니면 옛날 과거의 길을 청산하고 천사가 알려준 그 길로 따라 나설 것인가!
동방박사들에게 헤로데는 그 분 만나면
“나에게도 알려 주시오...나도 가서 경배할 터이니까”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헤로데에게 가지 말아라!”
예수님 만난 후에 선의 길, 착한 길로 들어서라!
다시 말하면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됩니다.
그저 듣기만 해서 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새해를 맞는다고 누구나 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헌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새해가 수천 번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여전히 새해는 뜨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별이오, 나침반입니다.
올 한해 우리 신자들의 福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나침반으로 보고
주님을 별로 보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아무리 십자가가 짓누른다고 해도
올 한해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하지 말고 끌어안으면서
기쁘게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