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선뜻 동의를 하지 못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안 보면 오히려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볼 때마다 눈에 거슬리고 그래서 한 마디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관계가 갈수록 나빠지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숫제 안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안 보이는 하느님 사랑이 오히려 쉽지 않을까요?
그런가 하면 정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서 오로지 하느님과만 대면하려고 하는데 자꾸 이웃들과 제가 하고 있는 일들에 저의 생각이 머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든 것 다 두고 떠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를 생각하며, 아니 그때를 대비하여 모든 것 초월하고 하느님 앞에만 오롯이 있고자 하지만 어느새 제 생각은 이웃에게 가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보여서 사랑하기가 쉽지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꼴 보기 싫어 보는 것을 단념할 때 사랑은 애초에 불성립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그 먼 과정이 첫 단계에서부터 멈추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의 여정은 여러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부산 한우리 음악회 때입니다. 그때 만났던 피아니스트 중의 한 분이 의미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연주 수준이 올라갈수록 다른 이의 연주에 관대해지고, 누구의 연주를 통해서도 배운다는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연주론이 아니라 뛰어난 덕론입니다.
덕이란 선과 관련한 능력인데 사랑은 덕 중에서도 이 선을 사랑하고 나누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수준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폐쇄되고 축소된 자기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선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꼴 보기 싫은 것투성이고 그 까다로운 자기 기준 때문에 선을 악으로 만듭니다.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선에 대한 요구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수준이 낮을수록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 수준의 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다 쓰레기투성이고 쓰레기이니 보기 싫어 외면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기가 없어지기에 까탈스런 자기 기준으로 선을 사랑하지 않고 그대로의 선을 볼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선을 쓰레기로 만드는 수준 낮은 사랑에 비교하면 수준 높은 사랑은 쓰레기 더미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사람의 선을 보고 사랑하며 하느님에게서는 하느님의 선을 보고 사랑합니다. 보일만큼 작은 인간의 선도 사랑하고 너무 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선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에는 작은 선을 사랑하는 단계에서 큰 선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고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랑에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첫 계단을 밟지 않고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