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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통과 생명" - 1.9,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09 조회수339 추천수8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9 주일 주님 세례 축일

이사42,1-4.6-7 사도10,34-38 마태3,13-17

 

 

 

 

 

"소통과 생명"

 

 

 

사람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 우주와 뭇 생명의 하느님입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의 하느님입니다.

하늘과 땅이, 땅에 있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아끼고 소통할 때

평화로운 조화의 세상입니다.

인위의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무죄한 많은 생명들이 사라져 가는 오늘의 안타까운 야만의 현실입니다.

구제역으로 인해 80여만 마리의 돼지들이 생매장당하는 수난의 시대에

민심도 흉흉합니다.

작년에는 천암함 사고로 46명의 젊은 병사들이 죽었고,

4대강 공사로 강에서는 숱한 생물들이 죽었으며

이어 무죄한 가축들의 떼죽음입니다.

요즘은 계속되는 추위에 삼한사온도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교만을 징벌하는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음 차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늘 주님 세례 축일에 ‘소통과 생명’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오늘 주님의 세례 장면은

그대로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통한 참 평화로운 장면입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뭇 생명들이 소통이 원활할 때

생명 충만한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오늘 이사야 독서(42,1-4.6-7) 중 빠진 42,5절 말씀이 아깝습니다.

들어보셔요.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의 조화롭고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 두 번째 독서 중 계응송도

하늘과 땅이 소통된 모습을 참 흥겹게 묘사합니다.

 

“오늘은 하늘이 열리고, 바다가 단 맛을 얻으며,

  땅이 기뻐하고, 산과 언덕이 춤추는 도다.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로다.”

 

하느님이 간절히 원하는 바는

하늘과 땅과 사람과 뭇 생명들이 서로 소통 교감하는 참 좋은 세상입니다.

바로 주님의 세례는 물론 우리의 세례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이런 세상의 실현입니다.

우리의 시야를 인간 넘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로 활짝 열어주는

세례성사의 은총입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모든 악(惡)의 뿌리입니다.

이래서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같이 겸손할 때 참 사람입니다.

오늘날 발생한 모든 재앙의 현실을 보셔요.

어김없이 그 안에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얼마나 겸손합니까?

진정 겸손할 때 아름답고 매력적입니다.

그 귀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요한을 찾아 내려와 세례를 청하십니다.

진정 하느님의 사람인지는 겸손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미천한 백성들과 똑같은 처지에 내려와

요르단 강에 자신을 던지는 예수님은 겸손의 극치입니다.

예수님의 겸손한 세례 은총으로 깨끗해지고 거룩해진 사람들이요

강의 자연입니다.

마찬가지 우리의 세례성사은총과 더불어

끊임없이 바치는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주변의 모두가 구원 받아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복음 말씀이 예수님 겸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애오라지 하느님 중심의 삶일 때 저절로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의로움을 이루는 것이 우선적 목표요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요한의 동료가됩니다.

‘우리’라는 단어에서

자신을 요한의 동료로 여기는 그 비하의 겸손이 참 감동적입니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 들였다.’

예수님의 겸손을 통해 즉시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요한입니다.

 

겸손한 이들은 무리하지 않고 하느님 뜻의 순리에 따릅니다.

늘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하느님께 코드를 맞춥니다.

민심은 천심이라 형제들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불필요하게 힘을 주지 않습니다.

얼마 전 읽은 ‘힘 빼세요.’ 란 글이 말마디가 잊혀 지지 않습니다.

알게 모르게 힘주고 살아 온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소문난 몸치답게 운동에는 젬병인데,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운동하러 갈 때 마다 선생한테 듣는 말이

  “힘 빼세요.”다.

  몸이 경직되면 운동 효과가 떨어질뿐더러 다치기 십상이란다.

  어디 운동뿐이랴.

  20여년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목에 힘주고 어깨에 힘주다

  한순간에 망가지는 사람 여럿 보았다.’

 

자신 보다 이웃이 힘주는 건 금방 알아채게 되고 저항에 직면합니다.

패망에 선봉인 교만입니다.

목과 어깨에 힘 빼는 겸손이

몸 건강에도 좋고 마음 건강에도 좋은 명약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치유되는 교만과 탐욕의 고질적 질병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체험하면 저절로 겸손에 무욕의 삶입니다.

 

겸손할 때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할 때 겸손입니다.

손과 함께 가는 하느님 체험입니다.

하느님께 우선 청할 것이 겸손의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겸손히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활짝 열린 하늘이요 하느님 체험입니다.

다음 장면이 예수님의 생생한 하느님 체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을 매개로 하여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로 소통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순백색 하늘 은총으로 빛나는 눈 덮인 배 밭 역시

하늘과 땅이 하나로 소통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세례은총으로 활짝 열린 영안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의 영을 보고 체험한 예수님이십니다.

바꿀 것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마음의 눈입니다.

정말 시급한 것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이 하느님 체험이, 하늘 체험이 없어

점차 세속화에, 물신주의에 노예화 되어 자기를 잃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체험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고  인간성 회복도 요원합니다.

물에서 올라온 예수님의 완전히 변화된 새로 난 모습에

하늘도 화답하여 자신을 활짝 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변화될 때

하늘은, 자연 만물은 자신을 열어 우리이게 말을 걸어오고

비로소 생명의 소통이 시작됩니다.

나지안죠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 장면을 참 심오하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역시 물에서 나오실 때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들고 올라오십니다.

  그리고 낙원의 문들이 불칼로 닫히듯

  아담이 닫아 버려 자신과 모든 후손들이 못 들어가게 한

  그 하늘의 갈라지고 열리는 것을 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구원 받은 세상이요 활짝 열린 하늘 문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주님을 따라 하늘 문을 향해 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하여 성령과 힘으로 충만한 예수님은

이웃의 구원을 향해 투신합니다.

우리가 갈 길을 보여줍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불가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위로 깨달음의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원한다는 말이

예수님께도 그대로 적용됨을 봅니다.

이사야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내가 너를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셨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하느님 체험의 진정성은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 실천으로 입증됩니다.

 

 

 

참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 없이 참 자기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참 나의 얼굴입니다.

하늘 열리며 하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은

그대로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미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참 얼굴 체험이, 신원의식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온갖 고난의 여정 중에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항구히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아들답게, 하느님의 종답게 사신 예수님의 삶을 통해

그대로 실현된 이사야 예언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영을 주었으니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이자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참 모습입니다.

소리 없이, 약하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섬세한 배려의 사랑을 실천하는 이가

진정 하느님의 사랑 받는, 마음에 드는 자녀임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모두가 사는 생명의 소통이요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소통의 생명이라면 반대로 불통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세례 축일에

우리 모두 소통으로 충만한 생명과 평화를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참 나를 발견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가 받은 세례은총을 상기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딸), 내 마음에 드는 아들(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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