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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쎄라비C'est La Vie!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윤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10 조회수515 추천수7 반대(0) 신고

 

 

멕시코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성탄과 새해를 깜뻬체 교구에서 함께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교님의 제안으로 보름 동안 깜뻬체에 다녀왔습니다. 체류 기간 동안 여러 본당들을 주교님과 함께 돌아볼 수 있어서 교구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깜뻬체 교구 안에는 두 개의 시市가 있는데 ‘깜뻬체의 성 프란치스꼬San Francisco de Campeche’와 ‘까르멘Ciudad de Carmen’이 그것들입니다. 이 두 개의 도시 안에 있는 본당들과 원주민들, 혹은 다른 주州에서 이주해온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시골 본당들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면과 환경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겠지요.

 

성탄이 막 지난 어느 날, 까르멘 시내의 가장 중심에 있는 ‘까르멘 성모 성당Santario de Nuestra. Señora de Carmen’의 본당 신부님에게 급한 일이 생겨서 며칠 본당을 비워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주교님이 제게 그 며칠 동안의 전례를 부탁하셨습니다. 교회법적 전문 용어로는 ‘땜빵’이라고 하던가...... 기억이 분명치는 않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 며칠 동안의 전례에는 12월 31일의 송년미사와 1월 1일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그리고 1월 2일에 맞이하게 된 2011년의 주님 공현 대축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간단한 짐을 꾸려서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 까르멘 행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검표원이 제게 건네는 한 마디에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이 표는 내일 건데요.” 주교님 비서 신부가 예매를 해 준 표였는데 아마 날짜를 확인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제 성격 상 그렇게 표를 건네받을 경우에는 꼭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데 서두르다 보니 저 역시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잘못도 있기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허허’ 쓴 웃음만 짓고 있었지요. 문제는 바로 그 날 저녁 송년미사부터 제가 집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움직이는 성탄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깜뻬체에서 바로 까르멘으로 가는 버스표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인근 메리다Mérida라는 도시에서 출발하는 버스표를 구했습니다. 다행히 미사 시간에 늦지 않게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10시에 시작하는 송년미사에는 제법 큰 성당인데도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신자 분들로 가득했습니다. 한국인 신부는커녕 외국인 신부가 거행하는 미사에도 참석해 본 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신자 분들은 미사 내내, 특히 강론을 하는 동안 내내 ‘저 동양인 신부가 어눌한 스페인어를 써서 무슨 말을 하나’하는 매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해 주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공지사항 시간에 주교님의 초청으로 앞으로 깜뻬체 교구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다른 교구 사제들과 똑같이 ‘잘’ 대해달라고 부탁을 하자 모든 신자들이 성당이 떠내려 갈 정도로 큰 박수와 환호로 답해 주었습니다. “아! 참 행복하구나! 선교사로 살아가는 매일 매일이 마치 오늘만 같아라!” 얼른 마음 안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선교사로 살아가는 동안 내내 수많은 도전과 실패와 좌절이 또한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남루한 옷차림의 노부부가 제의방으로 저를 찾아와서 다짜고짜 제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꼈습니다. 사연인 즉, 아들들은 미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고 하나 있는 딸 역시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는데 이번 성탄에는 그 자식들 중 한 명도 성탄을 지내러 집에 오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제 소개를 받고 나니까 더욱 자녀들 생각이 간절해져서 인사라도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아마 아들들은 불법으로 체류하는 신분이라서 입출국이 여의치 않았을 테고, 아르헨티나에 있는 딸은 너무 멀어서 아마 휴가 중에 집에 다녀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설날과 추석만큼이나 이곳 멕시코 사람들도 성탄과 새해만큼은 가족들이 꼭 함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속에 박혀 있습니다. 한참을 흐느껴 울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께 강복을 드리면서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대로 이 노부부의 슬픔을 곧 기쁨으로 바꾸어 주소서.”

 

다음 날 1월 1일과 1월 2일은 주일과 대축일이라서 하루에 여섯 대의 미사를 봉헌해야만 했습니다. 아침 7시 미사부터 저녁 8시 미사까지 하루 종일 미사를 드려야 했는데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더운 한 낮에 장백의와 제의로 온몸을 감싸고 미사를 드리는 일이 제게는 큰 고역이더군요. 1월 1일,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 낮 12시 미사를 마치고 성당 입구에서 신자 분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꾀죄죄한 몰골을 한 할머니께서 저를 손짓으로 부르시더니 제 손에 무엇인가를 꼭 쥐어주셨습니다. 제 손에는 10페소짜리 동전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이천 원이 조금 못되는 돈입니다. 할머니들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것 같습니다. 당신 군것질 거리라도 사드시지 뭐 하러 안 쓰고 모아서 제게 주셨는지 황송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 12장 41절에서 44절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떠올랐습니다. 그 과부의 렙톤 두 닢과 이 할머니의 10페소 두 닢은 모두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 할머니를 통하여 저는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또 고마운 생활 속의 스승들이십니다.

 

1월 2일, 주님 공현 대축일이 끝난 뒤에도 한 영감님이 제의방까지 찾아오셔서 고백성사를 청하셨습니다. 고백성사가 끝난 뒤 그 할아버지는 또 제 손을 붙잡고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지금 네 살이 되었는데도 아들이 개신교에 빠져서 성당에 나가지 않기 때문에 아직 손자가 유아세례도 받지 못했다며 이일을 어찌하면 좋을지를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럴 때는 솔직히 참 막막합니다. 평생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살아오신 그 할아버지께 타종파에서의 세례의 유효성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설명해 드리는 것이 무슨 그리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럴 때는 오히려 조용히 껴안아드리면서 강복해드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영감님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고 그 복이 길이 머물게 하소서!” 힘없이 돌아서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아들이라는 사람이 아버지의 이 피눈물을 좀 맛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일 미사의 봉헌 시간에는 한 가지 특별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봉헌금을 내는 신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신자들이 줄줄이 플라스틱 봉지에 물건들을 담아서 제대 앞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습니다. 나중에 미사가 끝난 뒤에 보니까 커피, 설탕, 소금, 화장지, 콩, 치약, 칫솔, 수건, 비누, 쌀, 쥬스, 콜라, 사이다, 옥수수 가루 등등, 별의 별 생활 용품들이 다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 생활용품들은 본당 신부와 사회봉사분과 위원들이 함께 차에 싣고 교구 내의 가난한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과 이주민들에게 전달한다고 하더군요. 제게는 참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봉헌금도 참으로 소중한 신자 분들의 마음이 담긴 예물이지만 이렇게 직접 삶에 필요한 식료품과 물품들을 마련하여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도 참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나눔의 실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팔뚝보다도 훨씬 굵은 1.5리터 들이 콜라 피이티 한 병을 낑낑대면서 들고 나와서 봉헌하는 조그만 꼬마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눈이 어찌나 크고 예쁘고 싱싱하던지 저는 미사를 드리다 말고 하마터면 내려가서 그 녀석을 껴안아 줄 뻔 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를 나눌 수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2박 3일 간의 본당 땜빵을 끝내고 밤 버스를 타고 깜뻬체에는 다음 날 새벽에 도착했습니다. C'est La Vie!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들 인생은 참으로 많은 다양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얼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뻐하다가 분노하고, 슬퍼하다가도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들 인생은 결코 마냥 기쁠 수만도, 마냥 슬플 수만도 없습니다. 매일 성을 낸 얼굴로 살아갈 수도 없고, 매일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희노애락이 잘 섞여져 있으니, 우리들은 인생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한 수, 또 한 수 배워가며 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인생이 매일 똑같은 변하지 않는 감정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설령 그것이 기쁨과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그 지루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들의 수를 셀 수도 없을 걸요? 우리들 삶 안에 노怒와 애哀가 있기에 희喜와 락樂이 더욱 값진 존재의 선물로 다가올 수 있고, 노怒와 애哀가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 겸손 되게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 인생 안에 희喜와 락樂이 있기에 우리들은 노怒와 애哀를 기꺼이 인내할 수 있고 하느님 앞에 겸손 되게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러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순환 고리를 통해서 우리들의 인생도, 신앙도 더욱 깊이 있고 견고하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희노애락喜怒哀樂! 이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인생의 소중한 한 부분들입니다. 그러니 작은 일상의 세세한 일들에 너무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언제나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려는 삶의 자세를 갈고 닦아 나간다면 이제 우리들은 아주 큰 깨달음에 가까이 와 있는 것입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어쩔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필연必然을 앞에 두고 좀 더 자연自然스럽게 인생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C'est La Vie!

 

멕시코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신부님의 '최강일기' 카페 http://cafe.daum.net/frchoikang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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