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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해골물 체험 -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윤혜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12 조회수619 추천수8 반대(0) 신고

그날 밤에는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탄산음료를 싫어하기 때문에 좀처럼 잘 마시지 않는데 그날 저녁에는 이상하게도 달짝지근한 게 생각나서 콜라를 한 캔 따서 마시다가 양이 너무 많아 반쯤 마시고는 나머지를 책상에 올려놓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하루 저녁에 적어도 서너 번은 깨어나서 시간도 확인하고, 물도 마시고 하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날 밤에도 잠에서 깨어나 여느 때처럼 불도 켜지 않은 채 물 대신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콜라를 마셨습니다. 김이 빠질 대로 빠진 콜라는 마치 설탕물처럼 콸콸 막힘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습니다. “아! 달콤하다.” 그런데 그 달콤한 뒤에 뭔가 찝찝한 이물감異物感이 혓바닥을 타고 전해졌습니다. 손으로 꺼내어 만져보니 아주 작은 무엇인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별 탈 없이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꺄악!” 아침에 깨어나서 저는 아주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나! 콜라의 단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새까맣게 캔에 들러붙어서 단 물을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젯밤의 그 이물감은? 못살어~~~ 적어도 백마리가 넘는 개미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을 것을 생각하면서 꼬물거리는 개미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달콤함은 온데간데없고 사라지고 메스꺼움만 남았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영성의 해를 보내던 중간에 파푸아 뉴기니에 선교실습을 갔을 때의 일입니다. 길도 뚫리지 않아 경비행기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던 ‘조셉스탈Joshepstaal’이라는 본당에는 전기가 들어가지 않아서 밤이 되면 달빛만 휘영청 홀로 세상을 밝혀주고 있었습니다. 보름달이 둥그렇게 뜬 어느 날 밤, 성당 마당을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방에 들어가려던 순간, 정말 제 팔뚝 굵기 만한 ‘비얌’ 한 마리가 뚫어진 방충망을 통해 제 방 안으로 반쯤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비얌’입니다. 덜덜덜 떨면서 같이 살던 호주 출신 ‘배리 놉스Barry Knobs’ 신부님 방으로 달려가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파푸아 뉴기니에서 이미 30년이 넘게 활동해 오신 신부님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아주 천천히 목이 긴 부츠로 갈아 신고는 작대기 하나를 들고 제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30분이 넘게 샅샅이 온 방 안을 뒤졌는데도 그 큰 뱀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분명히 두 눈으로 제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뱀을 똑똑히 봤는데도 말입니다. 놉스 신부님은 ‘별일도 아닌 것으로 귀찮게 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신 방으로 돌아가셨고 캄캄한 제 방에는 달빛과 저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안보였다면 더 나았을까요? 달빛에 슬쩍 비춰진 채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그림자 속에서 제가 느꼈을 공포감을 상상이나 하시겠습니까?

 

침대를 타고 기어올라 올까봐 눕지도 못하고, 발가락을 물릴까봐 바닥을 딛지도 못 한 채로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놓고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다음 날에는 새벽에 출발해서 하루 종일 뙤약볕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공소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워서는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비얌에 물려 죽으나, 피곤해서 쓰러져 죽으나 어차피 순교殉敎는 같은 순교’라는 비장한 각오로 침대에 누워서 잠깐이라도 눈을 부치기로 했습니다. 간밤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서움에 떨고 있었는지 몸은 이미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제가 침대에 올라 다리를 침낭 속으로 쑥 뻗는 순간, ‘꺄아아아악’! 침낭 속에는 제 발 끝에 걸리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처럼 놀랐던 적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싶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작대기로 침낭을 들추어내고 후레쉬를 비추어 보니 제 발 끝에 걸린 것은 다름 아닌 침낭에 붙어있는 두꺼운 조임 끈이었습니다. 행여 놉스 신부님이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오시면 또 얼마나 창피할까 싶어서 그 정신에도 새벽 운동을 하는 척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방 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분별은 인식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같은 콜라이지만 깜깜한 방에서 한 밤 중에 마신 콜라의 달콤함과 아침에 개미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콜라 캔을 보고 난 뒤의 불쾌감은 천지 차이입니다. 침낭을 단단하게 결속하는 기능을 하는 그 두꺼운 조임 끈은 언제나 그 자리에 붙어 있었지만 뱀에 대한 엄청난 공포 속에서 어둠 속에 발바닥에 닿은 그 끈은 실제 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되어버립니다. 똑같은 콜라와 침낭의 조임 끈이 내 마음의 상태에 따른 인식의 차이로 인해서 설탕물로도, 오물로도, 조임 끈으로도, 혹은 무시무시한 비얌으로도 변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원효의 해골물 체험’과도 비슷한 깨달음의 순간들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원효대사는 그러한 체험을 통해 큰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우리와 같은 범인凡人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해골물 체험’들을 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동일 본질을 두고도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그때그때 달라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효와 같은 큰스님조차도 “근원으로 돌아가는 크나큰 깨달음은 공을 쌓은 뒤에야 얻는 것이니, 흐름을 따르는 긴 꿈을 단번에 깰 수 없는 것”이라며 열심히 공부한 연후 변화무상變化無常한 자신의 마음과 인식을 바로 할 수 있었으니, 하물며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더 치열하게 매달려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겠는지 상상을 해 보세요.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신 절대자絶對者 하느님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는 일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우리를 향해 외치는 주님의 말씀을 마치 투쟁이라도 하듯 온 몸과 마음을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의 역사 안으로 투신投身하신 인간이신 주님은 알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당신을 보내신 ‘참되신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갈 길이 먼 우리를 매섭게 채찍질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입맛처럼이나 간사한 마음을 통한 인식이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보여주는 허상虛像의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영원불변永遠不變한 진리의 말씀이 보여주는 ‘참된 세상’에서 단 일각一刻이라도 머물기 위해서 우리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씀의 참 뜻을 헤아리기 위해 정진, 또 정진해야 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신앙은 행동에 앞서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결국 내 마음 속에 들어있는 욕심을 내려놓는 일이 되겠지요. 그 욕심이 조화를 부려 우리들의 행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신앙인들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실천해 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한 가지 구체적인 방향을 설정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부정否定의 방법론方法論’이라고 부르는데, 아주 간단합니다. 다음의 세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첫째,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하지 않는 것.

둘째, 하지 않아도 좋을 말을 하지 않는 것.

셋째, 갖지 않아도 좋은 것을 갖지 않는 것.

 

지금까지는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려고보면 하느님을 따르는 일에 조차도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의지’가 들어와 앉아 버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따르자면 眞(진실되고), 善(선하고), 美(아름다운)를 추구한다고 했던 일들이 어느 새 나의 욕심과 맞물려 전혀 다른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 반대로 ‘나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가’를 묻고 또 물어가면서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하지 않는데 마음을 모았더니 나의 의지와 욕심이 많이 내려지고 시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훨씬 여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의 성격에 따라 어떤 이들은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물으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행하는 쪽을 택하는 편이 좋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좀 더 쉽고 경쾌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막 시작한 이때, 소중한 나의 친구들에게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신 절대자絶對者 하느님을 보다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하여, 그 동안 여기까지 이고 지고 오느라 고생 많았던 마음도, 몸도 많이 내려놓고 이제는 좀 가볍게 가보자고 제안해 봅니다. 이 일 역시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말입니다.

멕시코 깜뻬체 교구에서 활동하시는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신부님의 카페 "최강일기' http://cafe.daum.net/frchoikang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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