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끊임없는 회개의 삶" - 1.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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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01-23 | 조회수457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1.23 연중 제3주일 이사8,23ㄴ-9,3 1코린1,10-13.17 마태4,12-23
"끊임없는 회개의 삶"
계속되는 강추위와 구제역 사태로 나라 안이 뒤숭숭하고 짙은 어둠이 드리운 때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 온 소설가인 박완서(정혜 엘리사벳)씨가 어제 선종하였습니다. 이례적으로 정치권에서도 대변인을 통해 한국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며 조의를 표했고, 정추기경도 ‘우리나라의 대표작가일뿐 아니라 가톨릭 신앙인으로서도 훌륭한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 조의를 표하며 고인과 유족을 위로했습니다. 마지막 책의 이름이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인 데, 못 가본 아름다운 길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께 가신 박완서 정혜 엘리사벳 자매이십니다. 위 책 중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나를 스쳐간 시간 속에 치유의 효능도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날 솎아낼 때까지는 이승에서 사랑 받고 싶고, 필요한 사람이고 싶고, 좋은 글도 쓰고 싶으니 계속해서 정신의 탄력만은 유지하고 싶다. 그나저나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지. 고통의 기억뿐 아니라 기쁨의 기억까지 신속하게 지우면서. 나 좀 살려줘,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리고 싶게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시간의 급행열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서히 완행으로 가는 것 같던 시간 열차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급행열차로 변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시간 급행열차에서 내려 하느님이 솎아낼 때까지 이승에서 필요한 사람 되어 사랑 받으며 좋은 일도 하면서 계속 정신의 탄력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천상병 시인처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말하며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만나십시오.
회개는 주님과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십시오. 하느님을, 하늘을 향해 활짝 마음 여는 게 회개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자기로부터 해방입니다. 시간으로부터 해방이요 지금 여기서 영원한 삶입니다. 시간의 급행열차에서 하차입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여유 없이 살아갑니까? 모두가 시간 급행열차에 몸을 실은 것 같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언제나 현재성을 띤, 바로 오늘 우리의 무딘 마음을 두드리는 우뢰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여 마음을 열지 않으면 지금 여기 도래한 하늘나라를 살지 못합니다. 하늘을 담아 안은 겨울나목들처럼 마음 활짝 열고 하늘나라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들, 하늘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평생 집과 가족, 고기잡이 생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어부들은 마음 깊이에서는 주님을 찾았고 주님은 이들을 찾아주셨습니다.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갈망의 사람,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를 보시고 부르신 주님은 이어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주님은 우리의 복된 운명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우리의 운명도 바뀝니다. 주님을 만나는 장소는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한번 만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만남의 회개입니다. 이래야 늘 새 날, 새 하늘, 새 땅의 삶입니다.
버리십시오.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을 버리십시오. 회개의 둘째 단계가 바로 버림이자 비움입니다. 사실 하느님 아닌 것은 모두 짐이 될 뿐이며 죽을 때 남는 단 하나는 하느님 한 분뿐입니다. 사실 주님을 만나면 저절로 버리고 비우고 나누기 마련입니다. 주님 친히 우리가 짊어진 멍에를 부수십니다. 당신의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으로 바꿔주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시몬과 안드래아 형제는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가장 끊기 어렵다는 가족과의 인연을 끊고, 재물의 소유를 끊고 말 그대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두에게 이런 버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삶의 중심을 나에게서 하느님께로 이동함으로 집착 없는 삶을 살면 충분합니다. 하여 사부 베네딕도는 그의 수도승들에게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십니다. 재물의 종이 아닌 주인이 되어 집착 없는 자유의 삶을, 또 사람을 사랑하되 집착 없는 초연한 사랑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기쁨은 버림의 비움에 있습니다. 넉넉한 비움의 공간은 생명과 사랑, 자유와 평화의 충만 입니다. 바로 이 비움의 넉넉한 공간을 찾아 무수한 이들이 수도원을 방문합니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요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온전히 비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안팎으로 부지런히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냉장고를, 방을, 책장을, 옷장을, 배를, 생각을, 마음을, 머리를, 욕심을 비우는 것입니다. 모든 방면에 걸친 버림의 비움은 우리의 평생 수행입니다. 서로 욕심을 버려 마음을 비울 때 저절로 공동체의 일치입니다.
“형제 여러분,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코린도 교회를 향한 간곡한 당부 역시 욕심을 비우고 주님의 마음으로 채울 때 분열은 저절로 사라지고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의 일치입니다.
떠나십시오.
주님을 따라 떠나는 것입니다. 버림에 이은 떠남입니다. 주님을 따라 떠나는 순례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버림의 비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따라 떠나는 게 회개의 3단계입니다. 이래야 늘 맑게 흐르는 정주의 삶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이지만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삶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어김없이 ‘버림’에 이은 ‘따름’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어부들처럼 문자 그대로 제자리를 떠나 주님을 따르지 않아도 됩니다. 제자리에 살아도 늘 엑서더스, 탈출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떠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끊임없이 이기적 나로부터 주님을 따라 떠나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어제도 미래도 아닌 늘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어제를 떠나지 못하고 어제에 사로잡혀,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는지요. 끊임없이 주님을 떠나 따를 때 회개의 완성이요 안정과 평화에 자유입니다. 마지막 죽음의 떠남도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은 단 하나 주님을 따르는 길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말고는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살만한 가치 있는 삶도 없습니다.
시간 급행열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영원한 현재를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끊임없는 회개의 삶뿐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우리가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우리에게 빛이 비칩니다.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우리를 찾아 만나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두를 버리고 비우십시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것입니다. 버리고 비울 때 비움의 공간 안에 가득 한 기쁨과 자유입니다. 주님을 따라 떠나십시오. 이래야 늘 영원한 현재의 삶입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끊임없이 만나고, 버리고, 떠나는 회개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의 미사와 성무일도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버리고 떠나는 회개의 여정이 이 공동전례 기도 안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강우일 주교님의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 제하의 기고문에서 결론 부분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타성에 젖은 마음을 일깨워 회개의 시야를 넓고 깊게 하는 예언자의 죽비 같은 말씀입니다.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교회는 세상이 오늘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또 어떤 아픔과 어떤 슬픔에 시달리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모두 예배 위주의 관행적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우리 자신과 무관한 일로 흘려보내지 말고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여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예수님처럼 시대의 가장 힘없는 이들, 고통 받는 피조물들의 고통과 신음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며 우리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바로잡아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먹는 데에도 인간답게 먹고, 그리스도인답게 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당신을 만나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 우리 모두를 당신의 영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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