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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방인에게 내린 은총[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2 조회수401 추천수6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진천 읍내를 다니다보면 현수막이 많이 걸려 있는데

<진천여중 몇 회 졸업생 사법고시 합격 경축>

이것을 거의 석 달 가까이 걸어놓았어요.

이젠 그만 경축을 해도 될 것 같은데~

 

 

그 현수막을 보면서 보는 사람마다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대로 된 집안이고, 행세깨나 하던 집안이고,

그 부모들이 인심을 잃지 않은 집안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아버지가 훌륭하더니 그런 인물이 나올 줄 알았어!’

 

그런데 그 집안이 자기네들이 볼 때 우습게 보았던 집안이라면

“그 할아버지가 우리 집 머슴이었던 거 알아? 우리 문간방에서 20년 살았어....

개천에서 용 났어~ 그 아버지 폼 잡는 것 어떻게 봐~”

 

이렇게 그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뒤에 딸려 있는 가족을 연결시켜서

그 사람을 평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신부님들이 사제서품을 받으면 불문률이 하나 있는데

자기 출신 본당으로는 절대 본당신부로 나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못 받는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을 다니시면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다음에 기쁜 마음으로 고향인 나자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는 탄복했습니다. 동시에 수근 거렸어요.

‘저 요셉의 아들 아니야~’

그 말 가운데는 경멸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마지못해 해야 하는 직업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가장 천하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가 돼지치기였고

그 다음 ‘오죽하면 저 직업을 할까!’ 하는 직업이 목수였어요.

 

 

저 젊은이가 기가 막힌 말을 하는데 집안 내력을 보니까

“목수 요셉의 아들이야~”

 

 

나자렛 고향에서 예수님이 거부당한 첫 번째 이유는

‘저거 목수 요셉의 아들 아니야?’

 

 

출신이라든가 가문이 그 사람의 인격에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상처가 많은 집안에서는 올바른 인격형성이 되지 않지요.

집안에 술주정꾼이 있는 집안은 술주정꾼이 나온다고 그랬습니다.

 

사람은 후천적인 노력으로 얼마든지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비천한 목수출신이었다고 해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면으로 거부한 겁니다.

우리들도 사람을 평가할 때 외부적인 것, 일시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싶은

그런 유혹을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이 받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두 번째 이유는

‘저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것은 ‘저거 과부의 아들이 아닌가!’ 그 뜻입니다.

 

 

이 말속에 예수님의 중대한 비밀 하나가 풀립니다.

요셉성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홀로 된 어머니를 두고 일찍 구원사업을 펴실 수가 없었던 겁니다.

나이 30이 될 때까지 어머니를 나자렛에서 정성껏 모시다가

30이 되어서야 공생활을 시작하신 것은 바로 어머니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 예수님이 거부당한 이유는 첫 번째, 목수라는 직업

두 번째, 과부의 아들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 가지 묵상을 해야 될 겁니다.

첫 번째 묵상거리는 아무리 중병환자라도 자신이 병이 낫기를 거부하고

의사를 문 앞에서 거부한다면 어떤 명의라도 그 환자를 고쳐줄 수가 없습니다.

 

환자 자신이 진료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나자렛 사람들은 중병환자였으나 예수님이라는 

명의가 왔어도 무시했고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닫아걸고 있을 때는 주님이

우리 마음을 치유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강론이지만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고 한 주일을 힘차게 살아갈 것을 결심합니다.

똑같은 강론이지만 분심 잡념가운데 귀를 닫아버리면 사제가 아무리 열을

내고 강론을 해도 그 강론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늘따라 강론 지겹게 기네~ 언제 끝나~ 12시 점심시간에 맞춰 갈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자렛 사람들은 본인 자신이 병자인지도 모르고 명의를 거부했던 겁니다.

 

 

두 번째 묵상거리는 나쁜 분위기 속에는 올바른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기대가 있는 분위기에서만 그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피정 때 성령의 불이 잘 붙습니다.

피정 때 오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뭔가 치유를 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앉아 있기 때문에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쫘~악 쫙 ’

말씀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고 치유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철야기도 할 때 간절한 만큼 정말 초롱초롱합니다.

 

 

강론을 하더라도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아주 힘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군대 사목 할 때, 연병장에 수백 명 앉아 있는  신병들 중에는

불교신자도 있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도 있고, 천주교신자는 가뭄에 콩 나듯 앉아 있고.....

‘너 떠들 테면 떠들어봐라~ 우리 시간 때우러 나왔다’

아무리 열을 내고 떠들어도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어떤 유혹이 드느냐!

‘한 시간 얼른 때우고 가야지~’

 

 

교도소 사목할 때 교도소에 가보면 강당에 인격지도 명목으로 수백 명 모아놓습니다.

거기에도 천주교신자들은 가뭄에 콩 나듯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조직폭력배, 사기범..... 잔뜩 앉아 있는데 그 앞에서 떠들어봐야

‘내가 너보다 더 잘 한다~’

픽픽거리기 때문에 그런 나쁜 분위기 속에서는 강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나쁜 분위기 속에서는 평화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이해하기를 거부하면

그들은 상처를 주고받고 오해를 품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에게 문을 크게 열어드릴 수도 있고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의 문을 '콱' 하고 닫을 수도 있습니다.

 

내 집에 계신 예수님을 끌어낼 수도 있고

예수님을 우리 집의 주인으로, 어른으로 섬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것, 예수님은 이렇게 고향사람,

나자렛 사람들에게 망신과 봉변을 당하신 후에 다른 고장으로 가셨고

돌아가시기까지 단 한 번도 당신 고향으로 가신 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위대한 업적들은

당신의 고향이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 다 이루어졌던 겁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예수님의 은총은 비처럼 내렸지~

고향사람들에게는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길가에 놓인 돌멩이 하나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례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천국 가는 지름길이다~

나는 세례 받았고, 본명 하나 받았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나는 천국 갈 수 있다~ 고 하는 그것은 자만입니다.

 

 

바오로 사도13장 46절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들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하와이 피정을 하면서 방송국에 가서 한 시간동안 대담을 했습니다.

그 아나운서가 저에게 마지막으로 뭘 물었느냐?

“신부님,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들 하는데 성당에 안 다니고, 예배당에 안 다니는 사람들은

다 구원 못 받고 지옥에 갑니까? 설명해 주십시오.“

 

 

65년도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공의회 이후에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천주교, 예수님이 전해진 것은 200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럼 200년 전에 우리 조상들은 예수님을 몰라서 다 지옥에 갔습니까?

자비하신 하느님인데 예수님 모르고 죽었다고 다 지옥에 간다면

어찌 사랑의 하느님이시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성당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았어도

개신교에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았어도 성당 다니는 사람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착하게,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문 안에서 물로 세례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삶 자체가 하느님을 향하고, 교회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서 ‘익명의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세례는 받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은 하느님의 구원권 안에 들어와 있다고 봅니다.

 

 

가끔 시내를 다니다 보면 교회 다니는 신자들 차에다

‘예수천국, 불신 지옥’

저는 그걸 볼 때마다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집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됩니다.

 

 

예수 믿으면 물론 천국 갑니다.

그러나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는 말은 너무 위험한 이야기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줍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받았다고 해서 천국 가는 보증수표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자렛이 예수님의 고향이라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나자렛 사람들이 다 축복 받는다~ 그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어도, 견진을 받았어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지 못하면~

열매를 구체적으로 맺지를 못하고 변화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비록 그 직책이 사제, 수도자라 하더라도

미사수건 쓰고, 본당의 모든 직책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자렛 쪽으로 가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축복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고

정말로 슬프게 당신의 고향을 떠났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와 신자들이 함께 아름답게 살 때

이곳에서 예수님은 살고 싶어 하십니다.

 

 

분열과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그런 교회에는

외관상으로는 성당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예수님 계시지 않고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려 있는 천주교 신자 집안이라 하더라도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집안이라면 십자가가 수십 개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예수님 계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럽고 악취가 나는 그 곳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이 모습을 보면서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이 내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은 금물이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명심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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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주님과 함께-성가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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