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우리, 착한 우리
(창세기 1,1-19)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다 같은 식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 생기라고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그대로 된 그것을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셨다는 식입니다.
이 단순한 말씀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묵상할 수 있는데,
선이란 무엇인가가 그중 가장 중요한 묵상꺼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철학인 형이상학에서
선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데,
선이란 인간이 원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악이란 반대로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 또는 싫어하는 그것이지요.
이렇게 인간 중심적으로 선악의 정의를 내리면
선과 악이란 것이 매우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왜냐면 좋고 싫음이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던 것도 싫증이 나면 싫어지고
그래서 좋은 것이 싫어하는 것으로 바뀌고
선이 악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얘기하는 선이란 하느님 중심적인 선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로, 하느님 뜻대로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된 것이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되자 하느님께서는 좋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대로 된 선들이 끝까지 선이기 위해서는
존재가 시작될 때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순종을 잘 해야 합니다.
생기라는 말씀에 잘 순종하였기에 생겨났는데
처음에는 잘 순종하던 존재가 아담과 하와처럼 나중에 불순종하면
불순종하는 그 순간, 선이던 것이 악으로 바뀝니다.
사실 “나”라는 존재는 순종 잘 하던 존재였고
순종을 잘 했기에 생겨난 존재입니다.
본래 “나”라는 존재가 없었고,
그래서 생기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 싫다고 하거나,
이런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싫다고 하거나,
반대로 저런 존재로 태어나겠다고 고집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겨난 것은 하느님 말씀이 너무 지엄하시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가 순종을 잘 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순종을 잘 하여 태어난 우리들은
끝까지 순종을 잘 하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우리가 끝까지 선하고
그런 우리에게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착한 사람에게 선, 곧 좋은 것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한자어 선(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지요.
착할 선과 좋을 선, 두 가지 뜻입니다.
순종 잘 하는 착한 사람에게 선이 주어진다는 뜻이겠지요?
우리 속담으로 말하면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생겨난, 선인 우리는
하느님 뜻대로 끝까지 살아가는, 착한 우리가 되어야 할 것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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