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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10 조회수1,056 추천수17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2월 10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Lord, even the dogs under the table
eat the children’s scraps.”
Then he said to her,
“For saying this,
you may go. The demon has gone out of your daughter.”
(Mk.7.27-28)
 
제1독서 창세기 2,18-25
복음 마르코 7,24-30
 
어렸을 때 저는 6남매 중에서 막내였고 또 집 안 형편도 그렇게 여유 있지 않았기에, 형 누나들의 옷들을 주로 물려받아 입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습니다. 내복을 입어야 하는데, 제 내복을 세탁했다고 어머니께서는 누나 내복을 입고 학교에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남자가 빨간 내복을 입을 수 있냐면서 울면서 입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어차피 내복은 속에 입어서 보이지 않는데 어떠냐면서 추운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냐며 저를 설득하셨지요.

어머니의 설득에 넘어간 저는 빨간 내복을 입고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다가 우연히 본 제 바지에 깜짝 놀란 것입니다. 글쎄 바지 지퍼가 고장 나서 그 사이로 빨간 내복이 환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은 남자가 빨간 내복을 입었다고 저를 놀리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습니다. 그 무너진 자존심에 저는 그 뒤로 아무리 추워도 내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때를 생각해보면 왜 그러한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웠나 싶습니다. 당시에는 남자들도 빨간 내복을 입곤 했으니 그렇게 끔찍한 망신도 아니었는데, 단순히 남자라는 이유를 내세워 겨울마다 춥게 지내는 어리석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저인 것입니다.

이렇게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저를 비롯하여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자존심 빼면 시체다.’라는 속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존심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더군다나 주님 앞에서도 이 자존심을 앞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나를 지탱해주는 것 같은 자존심까지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어머니를 만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머니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지요.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주님께서는 뜻밖에 모욕이 되는 말씀만 하시지요.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욕을 해대며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존심, 체면, 지식 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매달릴 뿐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가장 원했던 딸의 치유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아무 것도 내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에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내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십시오. 혹시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욕심과 이기심이 들 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기억하십시오. 그래야 주님 앞에 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칭찬은 평범한 말의 메아리다(엠브로스 비어스).




쉼표 하나에도(‘행복한 동행’ 중에서)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한창 작품에 몰두하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왔다.

“이렇게 화창한 날 아침에 책상 앞에 앉아 있다니, 어서 일어나게. 바람이나 쐬러 나가자고.”

그러나 플로베르는 작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할 수 없이 친구들은 그를 남겨둔 채 교외로 나가 이틀을 묵고 돌아왔다. 친구들이 돌아온 일요일 저녁, 플로베르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들을 맞이하자 그중 한 명이 물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좋고말고. 일을 아주 많이 했거든.”

친구들은 작품을 얼마나 썼는지 궁금하다며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내민 원고는 이틀 전과 비교해 전혀 진전이 없었다. 친구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대체 무얼 썼다는 건가? 우리가 보기엔 한 줄도 늘어나거나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러자 플로베르는 종이 위 한 문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이 쉼표를 보게. 그제 쉼표를 쌍반점으로 바꿨다가 오늘 다시 쉼표로 바꿨다네. 이틀 동안 이것 때문에 내내 씨름을 했지. 지금 이렇게 흡족하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알겠는가?”

플로베르는 쉼표 하나에도 무수히 많은 고뇌와 숙고의 과정을 거쳤다. 최적의 단어 하나를 찾아내는 데 몰두하는 집요함, 작은 점 하나까지도 허투루 찍지 않는 치밀함이 감히 흉내 내지 못할 거장의 작품을 만든 것이다.
 
 
 
Daniel Kobialka - Awaken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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