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차신 예수'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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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11-02-11 | 조회수51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신 예수 -유광수 신부-
말은 인간과 짐승과를 구분시킨다. 인간은 어떤 일정한 것에 속해있지 않고 그가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렇게 결정된다. 사실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되어 가는 존재이다. 그가 무슨 말을 듣느냐에 따라 거기에 응답한다. 하느님은 말씀이시고 전달자이시고 자신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무엇보다 귀를 갖고 듣는 존재이고 그 다음은 혀로 말하는 존재이다. 들음으로써 거기에 맞는 대답을 드리게 된다. 하느님과 대화가 시작되고 하느님의 파트너가 되고 하느님과 일치되고 하느님을 닮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을 들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귀먹은 반벙어리는 제일 나쁜 악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과 만나 유다인의 전통에 대해 논쟁을 하신 다음 이방인 지역인 띠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로 돌아 오셨다. 전통에 얽매여 사는 유다인 지역과 우상과 여러 잡신들을 믿는 이방인 지역을 오가시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높은 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허물어버리고 모두 하나 되도록 노력하신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에게 가까이 있던 유다인들에게나 다 같이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에페 2, 14- 17) 라고 적었다. 특히 마르코 복음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서이기 때문에 마르코는 이런 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줄 모르는 벙어리이며 기도할 줄도 모르는 벙어리이고 말씀을 들을 줄도 모르는 귀머거리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런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 주심으로써 예수님이 왜 이방인들에게 가셨는지 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자 했는 지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께 반항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한테도 복음을 전하셨고 또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인들의 지역인 여러 지방을 다니시면서도 복음을 전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그 누구와도 아무런 벽도 없고 또 적도 없다. 모두가 당신의 양들이며 돌보아 주어야 할 양이다. 우리들이 지방색을 따지고 서로 원수가 되고 적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모두 인간의 욕심 때문이며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우리도 서로간에 쌓인 벽을 허물고 서로를 받아 들여야 한다. 지방색을 허물고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어떤 사람인가? 첫째 신체적인 귀먹은 반벙어리가 있다. 이 사람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즉 듣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다. 귀를 갖고 있지만 듣지를 못하고, 입이 있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말을 하고 싶어도 말하지를 못하고 듣고 싶어도 듣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들을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자기를 흉보지나 않는가 아니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고 불안해 한다. 두 번째 심리적으로 귀먹은 반벙어리도 있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자신 안으로 움추려 드는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꺼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고 말할 상대가 없다. 함께 어울리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사람들을 만나면 두렵고 용기가 없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도 못하고 듣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이로 인해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자기 뜻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또 상대방의 뜻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게 되고 점점 폐쇄적인 사람이 된다. 서로 대화가 없을 때 오해가 생기게 된다. 셋째, 영적으로 귀먹은 반벙어리가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까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을 하라고 하면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모든 사람들은 다 병자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희랍어로 Moghilalos(모길라로스)라고 한다. 뜻은 둔한, 바보, 저능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좀 모자라는 사람, 바보같이 보이는 사람을 말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전혀 엉뚱한 말을 한다. 즉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하게 된다. 속에서만 끙끙 거리고 밖으로 속시원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좀 모자라는 것 같은 사람이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람이다. 듣지를 못하니까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소문이 그렇게 자자하지만 전혀 예수님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오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데리고 와야 예수님께 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귀머거리는 치료를 받을려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움 없이는 자신의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람이다.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이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문제 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또 예수님께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듯이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한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이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이다. 입은 말을 하는데 사용된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안는다는 것은 벙어리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하느님도 모르고 기도할 줄도 모르는 이방인의 상징이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이방인을 찾아 이 지방 저 지방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입이 열리고 귀가 열리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의 입이 열리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귀가 열리어 하느님의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예수님께 나아가 손을 얹어 고쳐달라고 청해보자 또한 귀먹은 반벙어리를 가리켜 바보, 저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둔하냐?"(마르8, 13)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은 분명히 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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